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남한과 북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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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남한과 북한(2)
흔히 지적되는 현상이긴 하지만, 남한 정부는 지금까지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에 시달려온 경험이 잦다. 예를 들어 북한이 한편으로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아직도 반 국가단체로 지목 당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에 의해서는 엄연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모순적 상황이 그 상징적인 사례다.
‘주적’은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
한마디로 대외정책은 국내정치의 연장이다.
분명한 것은 대북한정책의 개혁 없이는 대내적 개혁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즉 남한의 사회개혁은 통일정책의 개혁을 통해 비로소 완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개혁이 남한 사회 내부의 공생·공영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북에 대해 화해와 관용을 촉진하는 자세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최선의 대북 정책은 남한 내부의 사회복지 증진정책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주적’(主敵)은 김정일 체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남한 내부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을 최대한으로 극복해나갈 때 비로소 남한 주민의 올곧은 단합과 결속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되는 남한 내부의 강인한 결속력이야말로 어떠한 핵무기도 감히 짓부수지 못할 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은, 특히 소련 및 동유럽 공산권 붕괴 이후,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북한은 과거와는 달리, 통일보다는 오히려 평화공존에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이 야기한 핵 갈등은 평화공존을 전투적인 방법으로 쟁취해나가려는 안간힘의 표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에스프리’와 ‘디씨프린’어울어진다면(?)
역사적으로 예컨대 독일과 프랑스 사이는, 마치 남북한 관계처럼, 흔히 물불의 관계로 그려지고 있다. 두 나라는 전통적으로 앙숙 관계다.
하기야 독일의 맥주는 토론할 때처럼 시끄럽게 떠들며 들이켜야 어울리는 술이고, 프랑스의 포도주는 둘이서 그윽한 밀어를 속삭이며 홀짝여야 멋이 나는 술 아닐런가만. 또 불어는 따스한 인간의 정을 낭만적으로 감싸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지만, 독일어는 원수를 처단하기 위해 쓰는 말이라는 빈정거림도 있지 않은가.
한때 칼 슈미트 수상과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이 비슷한 시기에 각각 독일과 프랑스를 다스린 적이 있다.
이 둘 사이는 지극히 가까워서 이따금 물불의 관계를 두텁게 하려는 몸짓들을 간혹 주고받곤 했다. 그들은 가령 독일의 포도주에 프랑스의 치즈를 함께 곁들인다면 얼마나 상큼한 식탁이 될 것인가 하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아울러 재기 발랄한 프랑스인의 ‘에스프리’(기지나 창조적 발상)와 독일인의 ‘디씨프린’(엄격한 규율준수 정신)이 한데 어우러진다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넘치는 얘기가 어디에선가 등장한 적도 있다.
사람들은 또 이런 말들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안 될 일도 된다. 독일에서는 안 될 일은 안 된다. 한국에서는 어찌 될까? 한국에서는 안 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다”고.
금강산 조선족 종업원이 남북 이질감 완충역할
나는 작년 1월 우리 대학 20 여 명의 동료 교수들과 함께 육로로 금강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
우리들은 남한과 북한 양측에서 이른바 C I Q(Customs Immigration Quarantine = 세관 출입국 및 검역)라고 부르는 곳에서 통관 절차를 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컨대 우리가 외국 여행하듯이, 엄연한 독립 국가 상호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입국 절차를 다 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북한을 ‘반 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딱한 현실이 되풀이되고 있다.
다른 한편 금강산 지역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존재한다.
현대 아산에 의해 채용되어 각종 업무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이 대부분 다 연변에서 건너온 ‘조선족’이었다. 말하자면 이 조선족들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남-북의 이질감과 적대의식을 평화롭게 완충해주는 충격 방지용 수단으로 금강산 관광단지 내에서 적절히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바로 금강산의 ‘경계인’이었다.
아울러 또 다른 흥미로운 광경이 하나 더 눈앞에 전개되었다.
우리는 금강산에 도착한 날 저녁식사를 ‘금강원’이라는 북측 식당에서 했다. 그런데 그 식당의 술값과 보통 가게에서 파는 술값이 똑 같다는 말이 들려왔다. 뿐만 아니라 여성 종업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가 건네고자 했던 남한 식 팁을 한사코 거부하는 게 아닌가. 그녀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야요” 하며 우리의 ‘동포애’를 극력 물리쳤다.
그때 어느 교수 한 분이 “남한과 상이한 이러한 북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이 필수적이야.” 하는 바람에 다들 즐겁게 동병상련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남한은 프랑스와, 독일은 북한과 정신적 토양 유사
이런 맥락에서 살피면, 남한은 프랑스와, 그리고 북한은 독일과 대단히 유사한 정신적 토양을 공유한 것처럼 보인다.
남쪽 사람들은 프랑스 식 ‘에스프리’, 즉 영악하다고 비난받을 수 있을 정도로 기발하고 창의적인 발상법으로 충만해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대한’ 민족이 되도록 이끈다.
예컨대 명절이 되면 귀성 길은 차량의 홍수로 범람한다. 그러면 서울에서 대전까지도 무려 대 여섯 시간은 잡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위대한 남한 국민은 돈 몇 푼 던지고서는 멀쩡한 차를 견인차에 매달고 고스톱을 즐기며 여유 만만하게 갓길로 질주한다. 과연 이 세계에 이러한 창발력을 발휘할 민족이 우리 외에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반면에 북한 동포는 독일인들처럼 ‘디씨프린’, 즉 엄격한 규율준수 정신으로 무장해 있다.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 또는 근본주의자로 비칠 경우가 다반사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품질은 좀 뒤떨어질지 모르지만 마구잡이로 아무렇게나 엉터리로 만들어놓은 북한 상품은 거의 없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반면에 나의 소심함 때문에 그러리라 믿기도 하지만, 나는 겉으로 보기에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남한 생산품을 구입할 때, 과연 이 상표나 광고를 믿고 사도 뒤탈이 없을까 하는 공포심이 앞섬을 숨길 수 없다. 하지만 투박한 외양을 뽐내는 북쪽 제품을 이따금 손에 들 때, 최소한 속는 기분은 거의 들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해서, 혹시 ‘찬양·고무 죄’를 엄중히 선포하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으로 처벌을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학자적 양심’을 지킨다면, 남한 쪽 상품을 대하면 불신이, 반대로 북쪽 것에 대해서는 신뢰감이 앞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남북 힘 합치는 악어와 악어새 노릇 절실
지난 90년대 이후 주목할만한 세계사적 변화의 하나는 과거 공산권 지역에서는 민족분리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반면에, 자본주의 권에서는 민족통합 노력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소련 및 유고슬라비아 등이 첫 번 째 사례에 준하고, 독일의 통일이 두 번 째 일에 속한다.
그에 영향을 입어서인지, 전통적으로 평화공존을 주창해오던 남한은 심지어 ‘흡수통일론’까지 제기하기도 한다. 반면에 북한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공산권 붕괴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넘어서려는 듯 평화공존을 꿈꾸는 눈치다.
민족과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밭갈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보다 쟁기를 잡는 사람이 더 많아야 하고, 전쟁에 대해 평하는 자보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더 많아야 함은 정해진 이치 아니겠는가. 이런 뜻에서라도 남북한은 악어와 악어새 같은 사이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 전체의 부강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남북한 전체 민족이 힘을 합치면, 프랑스인의 ‘에스프리’와 독일인의 ‘디씨프린’을 한데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우리는 물불을 합치는 것과 같은 ‘역설’을 통해 솟구치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봄이 무엇인지 하는 걸 겨울이 되어야 참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모래처럼 흩어지는’ 모래가 그야말로 콘크리트처럼 튼튼히 뭉칠 수 있듯이, 그리고 웃음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코미디이듯이.
급속한 통일보다 한동안 평화공존 바라
모름지기 우리 민족은 역설을 뒤좇아야 한다.
이러한 역설을 사랑할 때, 우리 민족은 튼튼한 동포애로 뭉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역설의 힘이 실은 통일의 저력이 된다.
남-북한에서 힘을 사랑하는 인간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가진 인간끼리 서로 어우러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 민족의 이 ‘위대한’ 창의력을 통일의 힘으로 분출시켜야 한다.
그러나 특히 장기간의 민족적 이질성 등을 고려할 때, 나는 급속한 통일보다는 오히려 장기간의 평화공존이 궁극적 평화통일에 더욱 바람직하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가장 긴 남북한 평화공존이 가장 짧은 평화통일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박호성 교수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 사회과학대학 학장 겸 공공정책 대학원 원장으로 재직중이며 정치사상을 전공했다.
흔히 지적되는 현상이긴 하지만, 남한 정부는 지금까지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에 시달려온 경험이 잦다. 예를 들어 북한이 한편으로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아직도 반 국가단체로 지목 당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에 의해서는 엄연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모순적 상황이 그 상징적인 사례다.
‘주적’은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
한마디로 대외정책은 국내정치의 연장이다.
분명한 것은 대북한정책의 개혁 없이는 대내적 개혁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즉 남한의 사회개혁은 통일정책의 개혁을 통해 비로소 완결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개혁이 남한 사회 내부의 공생·공영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북에 대해 화해와 관용을 촉진하는 자세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최선의 대북 정책은 남한 내부의 사회복지 증진정책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주적’(主敵)은 김정일 체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남한 내부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을 최대한으로 극복해나갈 때 비로소 남한 주민의 올곧은 단합과 결속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되는 남한 내부의 강인한 결속력이야말로 어떠한 핵무기도 감히 짓부수지 못할 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은, 특히 소련 및 동유럽 공산권 붕괴 이후,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북한은 과거와는 달리, 통일보다는 오히려 평화공존에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이 야기한 핵 갈등은 평화공존을 전투적인 방법으로 쟁취해나가려는 안간힘의 표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에스프리’와 ‘디씨프린’어울어진다면(?)
역사적으로 예컨대 독일과 프랑스 사이는, 마치 남북한 관계처럼, 흔히 물불의 관계로 그려지고 있다. 두 나라는 전통적으로 앙숙 관계다.
하기야 독일의 맥주는 토론할 때처럼 시끄럽게 떠들며 들이켜야 어울리는 술이고, 프랑스의 포도주는 둘이서 그윽한 밀어를 속삭이며 홀짝여야 멋이 나는 술 아닐런가만. 또 불어는 따스한 인간의 정을 낭만적으로 감싸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지만, 독일어는 원수를 처단하기 위해 쓰는 말이라는 빈정거림도 있지 않은가.
한때 칼 슈미트 수상과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이 비슷한 시기에 각각 독일과 프랑스를 다스린 적이 있다.
이 둘 사이는 지극히 가까워서 이따금 물불의 관계를 두텁게 하려는 몸짓들을 간혹 주고받곤 했다. 그들은 가령 독일의 포도주에 프랑스의 치즈를 함께 곁들인다면 얼마나 상큼한 식탁이 될 것인가 하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아울러 재기 발랄한 프랑스인의 ‘에스프리’(기지나 창조적 발상)와 독일인의 ‘디씨프린’(엄격한 규율준수 정신)이 한데 어우러진다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넘치는 얘기가 어디에선가 등장한 적도 있다.
사람들은 또 이런 말들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안 될 일도 된다. 독일에서는 안 될 일은 안 된다. 한국에서는 어찌 될까? 한국에서는 안 되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다”고.
금강산 조선족 종업원이 남북 이질감 완충역할
나는 작년 1월 우리 대학 20 여 명의 동료 교수들과 함께 육로로 금강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
우리들은 남한과 북한 양측에서 이른바 C I Q(Customs Immigration Quarantine = 세관 출입국 및 검역)라고 부르는 곳에서 통관 절차를 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컨대 우리가 외국 여행하듯이, 엄연한 독립 국가 상호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입국 절차를 다 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북한을 ‘반 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딱한 현실이 되풀이되고 있다.
다른 한편 금강산 지역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존재한다.
현대 아산에 의해 채용되어 각종 업무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이 대부분 다 연변에서 건너온 ‘조선족’이었다. 말하자면 이 조선족들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남-북의 이질감과 적대의식을 평화롭게 완충해주는 충격 방지용 수단으로 금강산 관광단지 내에서 적절히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바로 금강산의 ‘경계인’이었다.
아울러 또 다른 흥미로운 광경이 하나 더 눈앞에 전개되었다.
우리는 금강산에 도착한 날 저녁식사를 ‘금강원’이라는 북측 식당에서 했다. 그런데 그 식당의 술값과 보통 가게에서 파는 술값이 똑 같다는 말이 들려왔다. 뿐만 아니라 여성 종업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가 건네고자 했던 남한 식 팁을 한사코 거부하는 게 아닌가. 그녀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야요” 하며 우리의 ‘동포애’를 극력 물리쳤다.
그때 어느 교수 한 분이 “남한과 상이한 이러한 북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이 필수적이야.” 하는 바람에 다들 즐겁게 동병상련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남한은 프랑스와, 독일은 북한과 정신적 토양 유사
이런 맥락에서 살피면, 남한은 프랑스와, 그리고 북한은 독일과 대단히 유사한 정신적 토양을 공유한 것처럼 보인다.
남쪽 사람들은 프랑스 식 ‘에스프리’, 즉 영악하다고 비난받을 수 있을 정도로 기발하고 창의적인 발상법으로 충만해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대한’ 민족이 되도록 이끈다.
예컨대 명절이 되면 귀성 길은 차량의 홍수로 범람한다. 그러면 서울에서 대전까지도 무려 대 여섯 시간은 잡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위대한 남한 국민은 돈 몇 푼 던지고서는 멀쩡한 차를 견인차에 매달고 고스톱을 즐기며 여유 만만하게 갓길로 질주한다. 과연 이 세계에 이러한 창발력을 발휘할 민족이 우리 외에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반면에 북한 동포는 독일인들처럼 ‘디씨프린’, 즉 엄격한 규율준수 정신으로 무장해 있다.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 또는 근본주의자로 비칠 경우가 다반사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품질은 좀 뒤떨어질지 모르지만 마구잡이로 아무렇게나 엉터리로 만들어놓은 북한 상품은 거의 없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반면에 나의 소심함 때문에 그러리라 믿기도 하지만, 나는 겉으로 보기에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남한 생산품을 구입할 때, 과연 이 상표나 광고를 믿고 사도 뒤탈이 없을까 하는 공포심이 앞섬을 숨길 수 없다. 하지만 투박한 외양을 뽐내는 북쪽 제품을 이따금 손에 들 때, 최소한 속는 기분은 거의 들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해서, 혹시 ‘찬양·고무 죄’를 엄중히 선포하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으로 처벌을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학자적 양심’을 지킨다면, 남한 쪽 상품을 대하면 불신이, 반대로 북쪽 것에 대해서는 신뢰감이 앞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남북 힘 합치는 악어와 악어새 노릇 절실
지난 90년대 이후 주목할만한 세계사적 변화의 하나는 과거 공산권 지역에서는 민족분리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반면에, 자본주의 권에서는 민족통합 노력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소련 및 유고슬라비아 등이 첫 번 째 사례에 준하고, 독일의 통일이 두 번 째 일에 속한다.
그에 영향을 입어서인지, 전통적으로 평화공존을 주창해오던 남한은 심지어 ‘흡수통일론’까지 제기하기도 한다. 반면에 북한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공산권 붕괴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넘어서려는 듯 평화공존을 꿈꾸는 눈치다.
민족과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밭갈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보다 쟁기를 잡는 사람이 더 많아야 하고, 전쟁에 대해 평하는 자보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더 많아야 함은 정해진 이치 아니겠는가. 이런 뜻에서라도 남북한은 악어와 악어새 같은 사이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 전체의 부강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남북한 전체 민족이 힘을 합치면, 프랑스인의 ‘에스프리’와 독일인의 ‘디씨프린’을 한데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우리는 물불을 합치는 것과 같은 ‘역설’을 통해 솟구치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봄이 무엇인지 하는 걸 겨울이 되어야 참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모래처럼 흩어지는’ 모래가 그야말로 콘크리트처럼 튼튼히 뭉칠 수 있듯이, 그리고 웃음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코미디이듯이.
급속한 통일보다 한동안 평화공존 바라
모름지기 우리 민족은 역설을 뒤좇아야 한다.
이러한 역설을 사랑할 때, 우리 민족은 튼튼한 동포애로 뭉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역설의 힘이 실은 통일의 저력이 된다.
남-북한에서 힘을 사랑하는 인간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가진 인간끼리 서로 어우러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 민족의 이 ‘위대한’ 창의력을 통일의 힘으로 분출시켜야 한다.
그러나 특히 장기간의 민족적 이질성 등을 고려할 때, 나는 급속한 통일보다는 오히려 장기간의 평화공존이 궁극적 평화통일에 더욱 바람직하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가장 긴 남북한 평화공존이 가장 짧은 평화통일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박호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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