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황국신민들’ - 두산그룹 설립자 박승직
작성자 하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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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근대기업 두산, 정말 자랑스럽습니까?
‘이 땅의 황국신민들’ - 두산그룹 설립자 박승직
방학진 기자
해방과 분단 60년을 맞이하는 2005년, 과거사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진실의 역사,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전 국민이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의 뼈아픈 역사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민족의 고통을 개인의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온 친일세력을 새롭게 조명해 과거사 청산에 작은 디딤돌이 되고자 ‘이 땅의 황국신민들’를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합니다. (편집자 주)
지난 2003년 1월 창원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회사측의 노조탄압에 항의해 분신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계는 두산제품 불매운동이라는 초강수로 대응하며 두산의 기업 이미지에도 상당한 타격을 가한 바 있다.
자칭 '민족자본'·'민족기업'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두산재벌이 어쩌자고 이처럼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같은 민족 성원임이 분명한 노동자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을까.
더욱이 두산중공업 노조는 2004년 1월엔 고 배달호씨 1주기를 맞아 추모비를 회사 내에 건립하고자 했지만 사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는 추모비를 트럭에 싣고 회사 내 진입을 시도했지만, 사측에서 물리력으로 막아 결국 두산중공업 입구 도로 옆 화단에 임시로 추모비를 세워놓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두산중공업 사측 관계자는 "신성한 작업장에 비석이 들어와서는 안되고 유서 내용도 새겨져 있어 회사 입장에서는 절대 반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신성한 작업장'이라고. 그럼 과연 자칭 '민족 기업'을 자랑하는 두산재벌의 뿌리가 정말 신성할까.
'민족'+'자본'. 이 두 단어가 합쳐 민족자본이라는 온전한 말은 될 수 있으되 그것은 순전히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민족자본', '민족기업'자체가 존재하기 힘든 지경임을 독자들은 다 알 것이다. 결국 민족은 이윤 추구를 위해 기업에 덧칠해진 '박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박가분을 잠시 지우고 두산재벌의 과거를 한번 들춰보자.
대부분의 재벌들과 마찬가지로 두산도 3대에 걸친 전통(?)있는 족벌기업이다.
두산의 출발은 현재의 오너인 박용성. 박용오 등의 할아버지인 박승직이 1896년 서울 배오개(지금의 종로4가 광장시장 4거리에서 창경궁쪽 코너)에서 면직물을 판매하는 '박승직상점'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 때 그의 나이 33세. 이를 두고 두산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한국의 개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1896년 8월, 당시 33세의 젊은이 박승직은 서울 배오개에 면직물을 주로 취급하는 조그만 점포를 개설하였습니다.
그 무렵 서민들에게 뛰어난 품질과 신용으로 널리 사랑받았던 그 작은가게가 바로 100년 기업 두산과 한국 기업의 근대사를 만들어낸 큰 터, 박승직 상점입니다. 서양의 문물이 물밀듯 밀려오면서 수동적으로 개화가 이루어지던 그 시절, 박승직이 배오개에 상점의 문을 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두산그룹 홈페이지에서)
마치 박승직을 시대의 조류를 내다본 선구적 민족 기업가로 묘사하고 있다.
연대로만 보자면 1896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의 치욕적인 해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꺾이고,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상황후가 살해되는 등 그야말로 조선이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서 서서히 망해가던 와중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개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다.
그야말로 작은 면직물 장사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매판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시대의 배경을 살펴보자.
1905년 일본인 재정고문에 의해 시행된 화폐제도개혁은 조선인 상인들의 파산을 초래했다. 이에 맞서 경성의 조선인 상인들은 [경성상업회의소]를 결성하여 대처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더불어 값싼 일본의 면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과정에서 조선의 포목상들은 경쟁력을 잃어가며 몰락하고 있었고 박승직을 비롯한 조선인 포목상들은 창신사(彰信社)라는 합명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의 대규모 방직회사의 횡포에 맞서 또 다른 일본 회사인 후지(富士)가스방적회사와 계약을 맺어 활로는 모색하지만 질 낮은 제품을 공급하므로 결국 창신사는 후지와의 거래를 청산한다.
박승직의 수완이 돋보이는 대목은 여기서부터이다.
박승직은 창신사를 탈퇴하고 재빨리 공익사라는 회사를 만들어 일본 대기업 이토추 상사(伊藤忠商社)의 자본을 끌어들인다.
물론 이 과정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도 작용하였다는 사실은 박승직의 매판성을 웅변해주고 있다.
박승직은 공익사 성장에 힘입어 제1차 세계대전리라는 전쟁특수도 톡톡히 누리며 조선 북부지역과 봉천·하얼빈에까지 사세를 확장하기에 이른다. 또 1916년에는 박가분 분공장을 1917년에는 곡물무역과 정미업을, 1918년 경성포목상조합 조합장이 된 후 1920년에 일본상인들과 연합하여 경성면사포상연합회를 만들어 부회장이 되었다. 1929년에 있었던 이 단체의 기념식장에서 미쓰이물산 서울지점장 박승직을 두고 '일조(日朝)협동기업'의 개척자라고 칭송하였다.
1919년 준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의 이사, 1921년에는 일선기업의 융합을 목적으로 열린 산업조사위원회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이 개최하였던 조선인산업대회의 지방위원, 1925년에는 상인들의 친목단체인 중앙번영회(경성상공협회로 개명) 회장,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겸 상담역,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참여하는 등 자신이 진 빚을 갚기라고 하는 듯 열렬히 일제에 협력하기에 이른다.
1933년에는 OB맥주의 전신 격인 소화기린맥주(일본의 대표적 맥주회사였던 기린맥주가 대주주)이사로 참가한 박승직은 일제의 중국침략시기에 최대의 호황을 누린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곧 박승직 상점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사실을 보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자본과 민족기업의 실체는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로 창씨개명한 박승직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수완을 전수받은 아들 박두병은 1946년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 날 두산이란 이름을 등장시킨다. 이러한 그들 가계의 역사를 그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박승직은 또한 기업을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민족의 힘으로 키우고자 하였습니다.
(중략) 1906년 지금의 한국 전경련 성격을 지닌 한성상업회의소 설립에 참여했는데, 이 회의소는 훗날 대한상공회의소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발전하는 나라, 한국의 힘이 되어온 민족기업, 바로 두산입니다.
(중략) 두산은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들보다 한발 앞선 통찰력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견실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두산의 역사는 바로 한국 기업의 역사이며 또한,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함께 해 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해 온 두산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업으로 고객 여러분과 함께 성장해 나가겠습니다."(두산그룹 홈페이지에서)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한 우리 현실에서 근대적 기업을 무분별하게 민족기업으로 상정하는 것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박승직이 조선인이라는 혈통의 문제를 빼곤 두산이 민족기업이라는 브랜드를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다.
진정한 의미의 민족기업·민족자본은 아직 존재한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매판 자본가의 의해서 족벌로 세습되는 두산과 같은 기업이 민족기업·민족자본 운운하는 현실이 상징적으로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 방학진 기자는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친일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 활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황국신민들’ - 두산그룹 설립자 박승직
방학진 기자
해방과 분단 60년을 맞이하는 2005년, 과거사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진실의 역사,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전 국민이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의 뼈아픈 역사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민족의 고통을 개인의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온 친일세력을 새롭게 조명해 과거사 청산에 작은 디딤돌이 되고자 ‘이 땅의 황국신민들’를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합니다. (편집자 주)
지난 2003년 1월 창원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회사측의 노조탄압에 항의해 분신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계는 두산제품 불매운동이라는 초강수로 대응하며 두산의 기업 이미지에도 상당한 타격을 가한 바 있다.
자칭 '민족자본'·'민족기업'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두산재벌이 어쩌자고 이처럼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같은 민족 성원임이 분명한 노동자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을까.
더욱이 두산중공업 노조는 2004년 1월엔 고 배달호씨 1주기를 맞아 추모비를 회사 내에 건립하고자 했지만 사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는 추모비를 트럭에 싣고 회사 내 진입을 시도했지만, 사측에서 물리력으로 막아 결국 두산중공업 입구 도로 옆 화단에 임시로 추모비를 세워놓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두산중공업 사측 관계자는 "신성한 작업장에 비석이 들어와서는 안되고 유서 내용도 새겨져 있어 회사 입장에서는 절대 반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신성한 작업장'이라고. 그럼 과연 자칭 '민족 기업'을 자랑하는 두산재벌의 뿌리가 정말 신성할까.
'민족'+'자본'. 이 두 단어가 합쳐 민족자본이라는 온전한 말은 될 수 있으되 그것은 순전히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민족자본', '민족기업'자체가 존재하기 힘든 지경임을 독자들은 다 알 것이다. 결국 민족은 이윤 추구를 위해 기업에 덧칠해진 '박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박가분을 잠시 지우고 두산재벌의 과거를 한번 들춰보자.
대부분의 재벌들과 마찬가지로 두산도 3대에 걸친 전통(?)있는 족벌기업이다.
두산의 출발은 현재의 오너인 박용성. 박용오 등의 할아버지인 박승직이 1896년 서울 배오개(지금의 종로4가 광장시장 4거리에서 창경궁쪽 코너)에서 면직물을 판매하는 '박승직상점'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 때 그의 나이 33세. 이를 두고 두산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한국의 개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1896년 8월, 당시 33세의 젊은이 박승직은 서울 배오개에 면직물을 주로 취급하는 조그만 점포를 개설하였습니다.
그 무렵 서민들에게 뛰어난 품질과 신용으로 널리 사랑받았던 그 작은가게가 바로 100년 기업 두산과 한국 기업의 근대사를 만들어낸 큰 터, 박승직 상점입니다. 서양의 문물이 물밀듯 밀려오면서 수동적으로 개화가 이루어지던 그 시절, 박승직이 배오개에 상점의 문을 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두산그룹 홈페이지에서)
마치 박승직을 시대의 조류를 내다본 선구적 민족 기업가로 묘사하고 있다.
연대로만 보자면 1896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의 치욕적인 해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꺾이고,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상황후가 살해되는 등 그야말로 조선이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서 서서히 망해가던 와중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개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다.
그야말로 작은 면직물 장사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매판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시대의 배경을 살펴보자.
1905년 일본인 재정고문에 의해 시행된 화폐제도개혁은 조선인 상인들의 파산을 초래했다. 이에 맞서 경성의 조선인 상인들은 [경성상업회의소]를 결성하여 대처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더불어 값싼 일본의 면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과정에서 조선의 포목상들은 경쟁력을 잃어가며 몰락하고 있었고 박승직을 비롯한 조선인 포목상들은 창신사(彰信社)라는 합명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의 대규모 방직회사의 횡포에 맞서 또 다른 일본 회사인 후지(富士)가스방적회사와 계약을 맺어 활로는 모색하지만 질 낮은 제품을 공급하므로 결국 창신사는 후지와의 거래를 청산한다.
박승직의 수완이 돋보이는 대목은 여기서부터이다.
박승직은 창신사를 탈퇴하고 재빨리 공익사라는 회사를 만들어 일본 대기업 이토추 상사(伊藤忠商社)의 자본을 끌어들인다.
물론 이 과정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도 작용하였다는 사실은 박승직의 매판성을 웅변해주고 있다.
박승직은 공익사 성장에 힘입어 제1차 세계대전리라는 전쟁특수도 톡톡히 누리며 조선 북부지역과 봉천·하얼빈에까지 사세를 확장하기에 이른다. 또 1916년에는 박가분 분공장을 1917년에는 곡물무역과 정미업을, 1918년 경성포목상조합 조합장이 된 후 1920년에 일본상인들과 연합하여 경성면사포상연합회를 만들어 부회장이 되었다. 1929년에 있었던 이 단체의 기념식장에서 미쓰이물산 서울지점장 박승직을 두고 '일조(日朝)협동기업'의 개척자라고 칭송하였다.
1919년 준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의 이사, 1921년에는 일선기업의 융합을 목적으로 열린 산업조사위원회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이 개최하였던 조선인산업대회의 지방위원, 1925년에는 상인들의 친목단체인 중앙번영회(경성상공협회로 개명) 회장,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겸 상담역,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참여하는 등 자신이 진 빚을 갚기라고 하는 듯 열렬히 일제에 협력하기에 이른다.
1933년에는 OB맥주의 전신 격인 소화기린맥주(일본의 대표적 맥주회사였던 기린맥주가 대주주)이사로 참가한 박승직은 일제의 중국침략시기에 최대의 호황을 누린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곧 박승직 상점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사실을 보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자본과 민족기업의 실체는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로 창씨개명한 박승직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수완을 전수받은 아들 박두병은 1946년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 날 두산이란 이름을 등장시킨다. 이러한 그들 가계의 역사를 그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박승직은 또한 기업을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민족의 힘으로 키우고자 하였습니다.
(중략) 1906년 지금의 한국 전경련 성격을 지닌 한성상업회의소 설립에 참여했는데, 이 회의소는 훗날 대한상공회의소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발전하는 나라, 한국의 힘이 되어온 민족기업, 바로 두산입니다.
(중략) 두산은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들보다 한발 앞선 통찰력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견실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두산의 역사는 바로 한국 기업의 역사이며 또한,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함께 해 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해 온 두산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업으로 고객 여러분과 함께 성장해 나가겠습니다."(두산그룹 홈페이지에서)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한 우리 현실에서 근대적 기업을 무분별하게 민족기업으로 상정하는 것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박승직이 조선인이라는 혈통의 문제를 빼곤 두산이 민족기업이라는 브랜드를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다.
진정한 의미의 민족기업·민족자본은 아직 존재한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매판 자본가의 의해서 족벌로 세습되는 두산과 같은 기업이 민족기업·민족자본 운운하는 현실이 상징적으로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 방학진 기자는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친일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 활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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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천하님의 댓글
천하 작성일
이런 글을 올려주신분께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두산이란곳이 이렇듯 반민족적이고 친일적인 매국노 집단인것을 자손들은 거짓포장으로
두산을 민족기업이란 고귀한 단어로 포장을했네요
정말 사람도 아닌것들입니다
저런 기업은 망해야합니다 친일 청산하듯 깡그리 재산 몰수해야합니다
친일청산님의 댓글
친일청산 작성일
친일청산의 이유가 여기에 다있네요
방기자님의 투혼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