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간부의 자세
작성자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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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간부의 자세
노동조합 간부의 자세
“간부는 헌신성이 있어야 합니다. 조합 간부의 헌신성이 없으면 지도 핵심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헌신성은 개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대중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동료들의 어려움, 고통을 잘 알고 대중으로부터 투쟁성, 창의성을 배우는 가운데 헌신성은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의 역할과 자세라는 주제의 교육을 할 때면 새로 간부가 된 사람들은 뭔가 딱 부러지는 정답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새로운 간부들이 노조 활동을 하는데 있어 도깨비방망이 같은, 뭔가 기발한 경험이나 원칙을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실제 노동조합 간부에게 요구되는 것은 활동을 성실하게 하는 가운데 누구나 다 체득할 수가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 활동가로서 노동자의 관점과 자세를 올바로 갖추는 것입니다. 사실 올바른 노동자의 관점과 자세를 갖고 있다면 간부로서 역량을 습득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음은 바람직한 노조 간부, 바람직한 노동운동가가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올바른 노동자의 관점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자
사람은 동물과 다르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는 사람이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로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혈연과 돈과 권력이 있고 없음으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받고 세상은 불평등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비인간적이고 불평등한 세상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판단과 자각에 따라 실천하고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운동의 시발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 자체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투쟁을 하게 됩니다. 억압, 수탈, 착취 등의 제반 요소들이 노동자들이 바라는 사람다운 삶을 제약하고 방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도전이,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인간적이고 민주적이고 평등하고 풍요롭게 만들려는 노력이 바로 노동운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노동운동은 인간해방운동입니다. 인간해방이라 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일하는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구성원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본능적인 저항, 자각된 저항, 이것이 바로 노동 운동입니다. 70년에 분신한 전태일 열사도 학식이 높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이 많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문제이다.”이것을 철학적, 논리적으로 분석한다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관은 역시‘인간 중시’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태일 평전의 핵심입니다.
뿐만 아니라 87년 7·8·9월 약 3개월 동안에 3천5백여 건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가장 많이 나왔던 구호가 무엇이었습니까?‘인간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분노나 불만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쌓여 있다가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터져 나온 요구가 바로‘인간답게 살아보고 싶다.’였습니다.
노동조합 운동은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고와 실천을 기본으로 요구합니다.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동료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노동운동의 출발점입니다. 가장 인간답게 살고 싶은 소박한 요구가 노동운동의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노동조합 간부는 인간을 가장 귀한 존재로 보아야 합니다.
2. 현실을 바로 보자
현실을 바로 보지 않으면 투쟁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노동운동을 둘러싼 현실은 매우 복잡합니다. 정세 변화는 어떠하고, 우리의 힘과 상대방의 힘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으며,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를 잘 판단하지 못하면 투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바로 보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현실을 개혁하는 노동운동
그런데 문제는 현실운동이라고 해서 현실에만 핑계를 대고 안주해서는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응당 자본이 판치는 세상이니까 아무리 해도 깨진다. 1987년 같은 경우는 좀 특별한 경우였다. 봐라 지금은 노동자의 힘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지 않느냐. 이럴 바에는 실리주의로 나가자.”는 식으로 된다면, 점차 노동자의 지위가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저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운동은 현실운동이기 때문에 현실을 잘 파악하여야 합니다. 물론 현실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고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현실을 잘 파악만 하고, 인정만 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을 잘 파악하여 현실을 개혁하도록 해야 합니다. 현실을 개혁하는 노동운동이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 처지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적이고 모순된 것을 개혁하는 것이 노동운동인 것입니다.
그런데 돈과 권력을 가진 자본가와 기득권 층은 현실을 가능하면 숨기려고 합니다. 반면 노동자, 농민, 서민 등 민중들은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려고 합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공직자들이 재산 등록을 했는데 등록하는 입장에서는 부정비리가 밝혀지니까 괴롭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입장에서는 신바람 납니다. 공직자의 거짓이 다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1987년에 박종철 학생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6·10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또한 지배 세력은 매스컴을 동원해서 가능하면 현실을 은폐하려 하거나 적어도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 합니다. 일반 서민들이나 국민들이 TV에서 노동자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매일 3∼4 시간씩만 본다면,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연속극의 한 프로만이라도 소년, 소녀 가장이 살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비춘다면 일반 국민들이 세상을 보는 눈은 엄청나게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의 TV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는 대부분 호화저택에 사는 사람들이거나, 전부 연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지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별로 없거나 있더라도 잘못 그려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 등 민중들은 가능하면 현실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어디서 돈을 구해다 선거를 하는지, 자본가들은 어떻게 돈을 벌어서 그렇게 떵떵거리면서 사는지, 경찰은 물론 국정원 같은 정보 기관의 내부는 어떻게 굴러가는지 가급적이면 좀 구체적으로 알자는 입장입니다. 노동운동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도 가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과 이야기하다 보면 제 사고가 고정되어 있고 굳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거의 대부분 이순신 장군이라고들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서울에서 태어난 양반 집안 출신입니다. 그런데 배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양반 출신이 어떻게 거북선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거북선은 뱃사람과 목수들이 만든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는 어느 교수 한 분이 학생들이 학교 곳곳에 대자보를 갖다 붙이니까,“학생들이 대자보를 온 벽에다 붙이는 바람에 이 좋은 학교가 엉망이 됐다. 학생들은 자기가 다니는 학교를 왜 저 모양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고 교수님은 학교의 고용인이 아닙니까? 자기 학교에 자기들이 필요해서 대자보를 붙이는데 뭘 걱정하십니까?”
1987년 대투쟁 당시 노동자들이 집회를 할 때 회사의 상무, 이사, 총무부장 등에게 나와서 노래 한 곡만 부르라고 해도 이들이 벌벌 떨었습니다. 항상 만만해 보였던 노동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덤비니까 겁을 집어먹은 것인데, 이들은 평소에 온순하던 노동자들이 이렇게 된 것은 외부 세력의 개입이 있기 때문이라고 오해합니다. 이처럼 이들은 항상 지배, 관리, 통제의 습성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현실을 바로 보는 것 같지만 가끔 우리의 의식 속에는 억압당하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미조직 사업장의 노동자들은“우리가 열심히 해야 회사가 잘 되고 회사가 잘 되면 우리도 잘 된다.”라는 식의 종업원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가 번영한다고 해서 반드시 노동자의 처지가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분배의 평등화를 위한 조건이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상황 판단도 잘 해야 하고 정세 분석도 늘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3. 세상은 변한다는 인식을 갖자
세상의 모든 것은 날마다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세상에 멈춰져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1987년 대투쟁이 일어나고 난 뒤 노동운동은 활발하게 발전했는데, 1990년대가 되면서 노동운동이 반대로 침체되기 시작했습니다. 간부들이 구속당하고 해고당하고 노조활동은 위축되었습니다. 또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그것이 한참동안 대중들의 맥을 빼놓았습니다. 노동운동을 낮게 보고 욕하는 이런 저런 말을 들으면서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도 하고 분노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노동운동도 세상 만물과 같이 늘 변화하고 발전하는 생물체와 같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정불변의 것으로 본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운동의 발전, 정세의 변화를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이 조금만 변해도 혼란스러워 하고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항시 변합니다. 1987년 이전의 노동조합운동을 돌이켜 봅시다. 당시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이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1987년 투쟁은 기적과도 같은 사건일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과학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고정불변 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때론 후퇴하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왜 발전합니까? 우선 사람의 생각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활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동의 형태와 질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투쟁하는 방법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발전의 법칙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데는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공통적인 법칙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모든 것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1996년 12월과 1997년 1월에 있었던 총파업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노동자의 편을 드는 세력과 자본가의 편을 드는 세력이 뚜렷이 나누어집니다. 언론과 공권력은 자본가의 편을 듭니다. 노동자와 가족들, 봉급생활자들, 농민들, 대학생들, 그리고 민주세력들은 노동자의 편을 듭니다. 이것을 보면 사회의 여러 세력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 현상은 상호연관성을 맺고 있으며, 날마다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그냥 오는 게 아닙니다. 기온, 습도, 공기밀도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둘째, 양·질 전화, 즉 양의 축적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동시에, 질이 변하면 양도 따라서 변합니다. 어떤 것이 많이 늘어나고 커지면 마침내 전혀 새롭고 다른 것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이때 사물은 급격하게 변합니다. 저절로 천천히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물은 점진적으로 끓는 것이 아니라 100°C에서 급격하게 끓으면서 수증기가 됩니다. 급격하게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노동운동에서 양의 축적이 질적 변화를 촉발시킨 예는 1987년 대투쟁입니다. 1987년 대투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억압과 수탈이 노동자들의 엄청난 분노와 반발을 일으켰고 어느 시점에 이르자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입니다. 서서히 오랜 기간 동안 투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와 맞물리면서 축적돼 왔던 불만이 갑자기 폭발하니까 한꺼번에 전국적인 투쟁으로 번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1996년 12월과 1997년 1월의 총파업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동안 성장한 노동운동의 역량이 없었다면 50년만의 정치 총파업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질 전화는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노동조합이 없을 때에 비해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욕하고 때리던 중간관리자들이 함부로 날뛰지 않습니다. 사장 마음대로 결정하던 임금도 노동자대표와 협상으로 결정됩니다. 자연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은 100°C가 되기 전에는 뜨겁기만 할 뿐 아직 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100°C가 되면 물이 수증기가 되면서 액체가 기체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셋째, 대립물이 통일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예로 들면 서로 대립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본가가 있으면 노동자가 있고, 양극이 있으면 음극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습니다. 악이 없다면 선의 개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립물 자체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치가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즉 때로 지배자가 피지배자가 될 수 있고 피지배자가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연과 사회의 공통적인 발전 법칙입니다. 인간의 의식도 마찬가지고 노동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운동도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관계와 연관을 맺으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통일을 이루는 관계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의 힘이 역전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변화가 더디고 운동이 침체될 수도 있지만, 일정한 시점이 되면 질적으로 변하고 발전하게 마련입니다.
변혁적인 관점
그런데 지배세력과 기득권 층은 이런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시대 때 부자들 중에는 큰 시위가 나면 식량과 의류를 준비하고 외화를 모으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회가 뒤집힐 때 자기들만 도망가기 위해서입니다. 재벌과 정치권력 그리고 언론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기득권 층은 작은 개혁조차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노동자의 처지에서, 민중의 처지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집이 헐려 길바닥에 나앉게 된 사람은 세상이 바뀌기를 바랄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주택을 지어 주는 세상이 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손가락이 잘리는 심한 재해를 당했는데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 사람도 세상이 바뀌기를 바랄 것입니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싶은데 등록금이 없어 공장으로 보내야 하는 부모도 세상이 바뀌기를 바랄 것입니다. 무료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지배세력과 기득권 층은 변화를 싫어하지만 지배당하는 민중들은 변화를 갈망합니다. 기존 질서의 비리와 모순 등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공 청문회 때 많은 사람들이 TV를 지켜보았습니다. 비리, 모순과 부정이 파헤쳐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합니다.
또한 지배세력은 가능한 한 체제를 옹호하고 미화하려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언론과 교육을 절대로 놓치려 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개가 빠지게 되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총과 칼만을 가진 폭력 집단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은 언론과 교육을 장악하려 합니다. 우리 나라의 언론이 벌이는 추태를 보십시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합법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전에 전교조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무튼 간부들은 현실을 움직이는 것으로 보되 변혁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4.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노동조합 간부는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활동해야 합니다. 작년 임투와 올해 임투는 다릅니다. 사용자의 자세가 달라졌고 주변 정세가 달라졌고, 그래서 조합원의 요구가 달라졌습니다. 똑같은 투쟁은 두 번 다시 없습니다. 그러기에 창의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노동조합의 경험, 다른 노동조합의 경험, 또는 다른 나라 노동조합의 경험에서 노동운동의 원칙을 끌어내야 합니다. 노동운동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원칙은 무수한 투쟁의 경험을 통해서 다다른 공통의 결론이고 교훈입니다. 노동운동은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간부의 머리 속에서 창의성을 짜낼 것이 아니라 대중 토의를 통해서 창의성을 높여 내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 할지라도 대중 토의를 통해서 나온 창의적인 방법이나 현실적인 판단을 쫓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소중히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중시하지 않으면 권위주의자가 됩니다. 개인의 판단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미 문제가 있으면 해결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조합 운동가에게는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바람이 부는 날이 있으면 잔잔한 날도 있습니다. 별빛조차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이 있는가 하면 보름달 환히 비추는 환한 밤도 있습니다. 지금은 어렵고 조합원들도 자신 없어 하더라도 상황은 언제든지 달라집니다. 세상은 변화하고 발전합니다. 이것을 명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5. 민주적인 태도를 갖자
노조 활동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권위주의적 자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민주적인 집행부가 들어선 경우에는 덜합니다만, 1987년 이전의 노동조합 간부들은 대부분 권위주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투부터 달랐습니다. 조합원을‘우리 애들’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이런 간부들이 많습니다. 조합 사무실은 호화로웠습니다. 어떤 노동조합에서는 조합원들이 위원장을 노무담당 상무로 착각하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위원장이 조합 사무실보다는 관리 사무실에 더 많이 가 있고, 시간이 나더라도 현장보다는 밖으로 나돌아다니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입니다. 과거 연맹 위원장이면서 단위 조합 위원장이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월급에서부터 모든 것을 상무이사 급으로 대우받았습니다. 회사에서 차도 대주고 운전사도 대주었습니다. 이런 정도였으니 조합원들이 위원장을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지금 민주노조라 불리는 노동조합의 간부 중에서도 일상 생활이 민주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특히 부인들에게 하는 것을 보면 전혀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권위주의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계급사회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힘이 센 사람이 큰소리치고 특권을 누리는 사회이다 보니, 자연히 지배계급의 위치에서는 권위주의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권위주의를 가지고 유지될 수 있는 조직이 아닙니다. 노동조합은 대중조직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참여가 없으면 힘이 만들어질 수 없는 조직입니다. 물론 지도자가 권위가 있어야 하지만 스스로 권위를 부린다고 권위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대중조직의 지도자는 조합원 대중이 권위를 부여해 줄 때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지도자는 민주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6.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자
민주주의는 비판을 보장하고 허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조합원들의 비판에 대해 변명만을 늘어놓거나 반발하는 간부가 있는데, 이런 사람은 지도자가 될 자질이 없습니다.
노보의 첫 면 맨 위를 위원장 사진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이는 위원장의 사진을 꼭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노보의 위원장 사진을 보면서, 전두환 정권 시절에 우리가 9시 뉴스를 보면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운동권의 병폐 가운데 하나가‘서로 대강 봐주기’입니다. 그렇지만 서로에 대한 비판이 없으면 조직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남이 자기에게 이야기 해 주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하는 잘못을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애정 있는 비판이 필요합니다. 비판이야말로 권위주의를 없애는 가장 훌륭한 수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매개가 있어야 합니다. 뒷자리에서 어떤 사람에 대한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식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상집 회의, 대의원회, 현장소모임 등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사업과 활동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7. 노동 대중에게 헌신하는 자세를 갖자
간부는 헌신성이 있어야 합니다. 조합 간부의 헌신성이 없으면 지도 역량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헌신성은 개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대중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로부터 시작됩니다. 동료들의 어려움, 고통을 잘 알고 대중으로부터 투쟁성, 창의성을 배우는 가운데서 헌신성은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노동 대중의 상태, 요구, 의식을 직접 부닥쳐서 조사하고 경험하면서 헌신성이 높아집니다.“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도 있구나.”라고 자각할 때 헌신성은 높아지게 됩니다. 같은 공장의 울타리 안에서 근무하는 사내 하청 노동자들을 같은 동료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구호를 외칠 때는‘노동자는 하나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종 집회나 투쟁하는 사업장을 방문하면서 이런 생각은 바뀌게 됩니다. 완성차 노동자들이 부품 공장에 가서 보면서 배우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우리는 그래도 여기에 비하면 훨씬 낫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영세 사업장, 하청·용역회사 소속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게 되면서, 열심히 활동하는 출발점으로 삼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비판을 두려워해서는 헌신성이 나올 수 없습니다. 비판을 올바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 형제들에 대한 수탈, 억압, 탄압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증오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노동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투쟁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헌신성이 나올 수 없습니다.
8. 노동자의 도덕성을 갖추자
노동자적인 도덕성을 갖춘다는 것은 우선‘예의바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이 이야기는 마치 봉건 질서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현실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일반 대중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문제, 그들이 좋아하는 문제를 인정하면서 개혁할 생각을 해야지 이것을 무시해서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 사회의 도덕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을 전적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인정해야만 하는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대중은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반면에 대중의 전근대성과 봉건성은 활동과 실천을 통해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교육장에 가서도 밤새도록 술 마시고 화투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부인에게는 독재자로 군림합니다. 나쁜 습관과 행동은 모두의 활동과 투쟁을 통해 극복해 나가려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도덕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배세력이 바라는 도덕이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충효는 뭡니까? 지배세력에게 도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삼강오륜’이라는 것은 기존의 질서와 윤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도덕입니다.
우리 노동자들이 강조하는 도덕은 무엇입니까? 동료애입니다. 동료애에 바탕을 둔 단결은 튼튼합니다. 불의에 대한 항거, 사실에 근거한 비판 정신,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 등이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도덕입니다.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이런 도덕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형식적인 도덕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노동조합 간부들에게는 이런 도덕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의 품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노동자는 우선 소박합니다. 작업복이 편하고 포장마차가 어울리는 그런 소박함입니다. 그리고 솔직합니다. 그리고 비굴하지 않지만 겸손합니다. 또한 성실하고 용감합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개발하고 다듬어야 할 품성입니다. 간부들이 가져야 할 품성은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좋은 품성들을 더 가다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동조합 간부의 자세
“간부는 헌신성이 있어야 합니다. 조합 간부의 헌신성이 없으면 지도 핵심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헌신성은 개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대중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동료들의 어려움, 고통을 잘 알고 대중으로부터 투쟁성, 창의성을 배우는 가운데 헌신성은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의 역할과 자세라는 주제의 교육을 할 때면 새로 간부가 된 사람들은 뭔가 딱 부러지는 정답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새로운 간부들이 노조 활동을 하는데 있어 도깨비방망이 같은, 뭔가 기발한 경험이나 원칙을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실제 노동조합 간부에게 요구되는 것은 활동을 성실하게 하는 가운데 누구나 다 체득할 수가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 활동가로서 노동자의 관점과 자세를 올바로 갖추는 것입니다. 사실 올바른 노동자의 관점과 자세를 갖고 있다면 간부로서 역량을 습득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음은 바람직한 노조 간부, 바람직한 노동운동가가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올바른 노동자의 관점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자
사람은 동물과 다르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는 사람이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로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혈연과 돈과 권력이 있고 없음으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받고 세상은 불평등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비인간적이고 불평등한 세상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판단과 자각에 따라 실천하고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운동의 시발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 자체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투쟁을 하게 됩니다. 억압, 수탈, 착취 등의 제반 요소들이 노동자들이 바라는 사람다운 삶을 제약하고 방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도전이,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인간적이고 민주적이고 평등하고 풍요롭게 만들려는 노력이 바로 노동운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노동운동은 인간해방운동입니다. 인간해방이라 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일하는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구성원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본능적인 저항, 자각된 저항, 이것이 바로 노동 운동입니다. 70년에 분신한 전태일 열사도 학식이 높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이 많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문제이다.”이것을 철학적, 논리적으로 분석한다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관은 역시‘인간 중시’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태일 평전의 핵심입니다.
뿐만 아니라 87년 7·8·9월 약 3개월 동안에 3천5백여 건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가장 많이 나왔던 구호가 무엇이었습니까?‘인간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분노나 불만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쌓여 있다가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터져 나온 요구가 바로‘인간답게 살아보고 싶다.’였습니다.
노동조합 운동은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고와 실천을 기본으로 요구합니다.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동료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노동운동의 출발점입니다. 가장 인간답게 살고 싶은 소박한 요구가 노동운동의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노동조합 간부는 인간을 가장 귀한 존재로 보아야 합니다.
2. 현실을 바로 보자
현실을 바로 보지 않으면 투쟁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노동운동을 둘러싼 현실은 매우 복잡합니다. 정세 변화는 어떠하고, 우리의 힘과 상대방의 힘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으며,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를 잘 판단하지 못하면 투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바로 보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현실을 개혁하는 노동운동
그런데 문제는 현실운동이라고 해서 현실에만 핑계를 대고 안주해서는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응당 자본이 판치는 세상이니까 아무리 해도 깨진다. 1987년 같은 경우는 좀 특별한 경우였다. 봐라 지금은 노동자의 힘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지 않느냐. 이럴 바에는 실리주의로 나가자.”는 식으로 된다면, 점차 노동자의 지위가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저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운동은 현실운동이기 때문에 현실을 잘 파악하여야 합니다. 물론 현실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고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현실을 잘 파악만 하고, 인정만 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을 잘 파악하여 현실을 개혁하도록 해야 합니다. 현실을 개혁하는 노동운동이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 처지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적이고 모순된 것을 개혁하는 것이 노동운동인 것입니다.
그런데 돈과 권력을 가진 자본가와 기득권 층은 현실을 가능하면 숨기려고 합니다. 반면 노동자, 농민, 서민 등 민중들은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려고 합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공직자들이 재산 등록을 했는데 등록하는 입장에서는 부정비리가 밝혀지니까 괴롭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입장에서는 신바람 납니다. 공직자의 거짓이 다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1987년에 박종철 학생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6·10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또한 지배 세력은 매스컴을 동원해서 가능하면 현실을 은폐하려 하거나 적어도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 합니다. 일반 서민들이나 국민들이 TV에서 노동자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매일 3∼4 시간씩만 본다면,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연속극의 한 프로만이라도 소년, 소녀 가장이 살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비춘다면 일반 국민들이 세상을 보는 눈은 엄청나게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의 TV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는 대부분 호화저택에 사는 사람들이거나, 전부 연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지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별로 없거나 있더라도 잘못 그려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 등 민중들은 가능하면 현실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어디서 돈을 구해다 선거를 하는지, 자본가들은 어떻게 돈을 벌어서 그렇게 떵떵거리면서 사는지, 경찰은 물론 국정원 같은 정보 기관의 내부는 어떻게 굴러가는지 가급적이면 좀 구체적으로 알자는 입장입니다. 노동운동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도 가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과 이야기하다 보면 제 사고가 고정되어 있고 굳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거의 대부분 이순신 장군이라고들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서울에서 태어난 양반 집안 출신입니다. 그런데 배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양반 출신이 어떻게 거북선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거북선은 뱃사람과 목수들이 만든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는 어느 교수 한 분이 학생들이 학교 곳곳에 대자보를 갖다 붙이니까,“학생들이 대자보를 온 벽에다 붙이는 바람에 이 좋은 학교가 엉망이 됐다. 학생들은 자기가 다니는 학교를 왜 저 모양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고 교수님은 학교의 고용인이 아닙니까? 자기 학교에 자기들이 필요해서 대자보를 붙이는데 뭘 걱정하십니까?”
1987년 대투쟁 당시 노동자들이 집회를 할 때 회사의 상무, 이사, 총무부장 등에게 나와서 노래 한 곡만 부르라고 해도 이들이 벌벌 떨었습니다. 항상 만만해 보였던 노동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덤비니까 겁을 집어먹은 것인데, 이들은 평소에 온순하던 노동자들이 이렇게 된 것은 외부 세력의 개입이 있기 때문이라고 오해합니다. 이처럼 이들은 항상 지배, 관리, 통제의 습성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현실을 바로 보는 것 같지만 가끔 우리의 의식 속에는 억압당하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미조직 사업장의 노동자들은“우리가 열심히 해야 회사가 잘 되고 회사가 잘 되면 우리도 잘 된다.”라는 식의 종업원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가 번영한다고 해서 반드시 노동자의 처지가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분배의 평등화를 위한 조건이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상황 판단도 잘 해야 하고 정세 분석도 늘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3. 세상은 변한다는 인식을 갖자
세상의 모든 것은 날마다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세상에 멈춰져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1987년 대투쟁이 일어나고 난 뒤 노동운동은 활발하게 발전했는데, 1990년대가 되면서 노동운동이 반대로 침체되기 시작했습니다. 간부들이 구속당하고 해고당하고 노조활동은 위축되었습니다. 또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그것이 한참동안 대중들의 맥을 빼놓았습니다. 노동운동을 낮게 보고 욕하는 이런 저런 말을 들으면서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도 하고 분노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노동운동도 세상 만물과 같이 늘 변화하고 발전하는 생물체와 같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정불변의 것으로 본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운동의 발전, 정세의 변화를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이 조금만 변해도 혼란스러워 하고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항시 변합니다. 1987년 이전의 노동조합운동을 돌이켜 봅시다. 당시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이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1987년 투쟁은 기적과도 같은 사건일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과학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고정불변 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때론 후퇴하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왜 발전합니까? 우선 사람의 생각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활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동의 형태와 질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투쟁하는 방법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발전의 법칙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데는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공통적인 법칙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모든 것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1996년 12월과 1997년 1월에 있었던 총파업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노동자의 편을 드는 세력과 자본가의 편을 드는 세력이 뚜렷이 나누어집니다. 언론과 공권력은 자본가의 편을 듭니다. 노동자와 가족들, 봉급생활자들, 농민들, 대학생들, 그리고 민주세력들은 노동자의 편을 듭니다. 이것을 보면 사회의 여러 세력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 현상은 상호연관성을 맺고 있으며, 날마다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그냥 오는 게 아닙니다. 기온, 습도, 공기밀도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둘째, 양·질 전화, 즉 양의 축적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동시에, 질이 변하면 양도 따라서 변합니다. 어떤 것이 많이 늘어나고 커지면 마침내 전혀 새롭고 다른 것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이때 사물은 급격하게 변합니다. 저절로 천천히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물은 점진적으로 끓는 것이 아니라 100°C에서 급격하게 끓으면서 수증기가 됩니다. 급격하게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노동운동에서 양의 축적이 질적 변화를 촉발시킨 예는 1987년 대투쟁입니다. 1987년 대투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억압과 수탈이 노동자들의 엄청난 분노와 반발을 일으켰고 어느 시점에 이르자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입니다. 서서히 오랜 기간 동안 투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와 맞물리면서 축적돼 왔던 불만이 갑자기 폭발하니까 한꺼번에 전국적인 투쟁으로 번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1996년 12월과 1997년 1월의 총파업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동안 성장한 노동운동의 역량이 없었다면 50년만의 정치 총파업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질 전화는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노동조합이 없을 때에 비해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욕하고 때리던 중간관리자들이 함부로 날뛰지 않습니다. 사장 마음대로 결정하던 임금도 노동자대표와 협상으로 결정됩니다. 자연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은 100°C가 되기 전에는 뜨겁기만 할 뿐 아직 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100°C가 되면 물이 수증기가 되면서 액체가 기체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셋째, 대립물이 통일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예로 들면 서로 대립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본가가 있으면 노동자가 있고, 양극이 있으면 음극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습니다. 악이 없다면 선의 개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립물 자체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치가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즉 때로 지배자가 피지배자가 될 수 있고 피지배자가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연과 사회의 공통적인 발전 법칙입니다. 인간의 의식도 마찬가지고 노동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운동도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관계와 연관을 맺으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통일을 이루는 관계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의 힘이 역전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변화가 더디고 운동이 침체될 수도 있지만, 일정한 시점이 되면 질적으로 변하고 발전하게 마련입니다.
변혁적인 관점
그런데 지배세력과 기득권 층은 이런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시대 때 부자들 중에는 큰 시위가 나면 식량과 의류를 준비하고 외화를 모으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회가 뒤집힐 때 자기들만 도망가기 위해서입니다. 재벌과 정치권력 그리고 언론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기득권 층은 작은 개혁조차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노동자의 처지에서, 민중의 처지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집이 헐려 길바닥에 나앉게 된 사람은 세상이 바뀌기를 바랄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주택을 지어 주는 세상이 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손가락이 잘리는 심한 재해를 당했는데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 사람도 세상이 바뀌기를 바랄 것입니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싶은데 등록금이 없어 공장으로 보내야 하는 부모도 세상이 바뀌기를 바랄 것입니다. 무료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지배세력과 기득권 층은 변화를 싫어하지만 지배당하는 민중들은 변화를 갈망합니다. 기존 질서의 비리와 모순 등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공 청문회 때 많은 사람들이 TV를 지켜보았습니다. 비리, 모순과 부정이 파헤쳐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합니다.
또한 지배세력은 가능한 한 체제를 옹호하고 미화하려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언론과 교육을 절대로 놓치려 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개가 빠지게 되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총과 칼만을 가진 폭력 집단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은 언론과 교육을 장악하려 합니다. 우리 나라의 언론이 벌이는 추태를 보십시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합법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전에 전교조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무튼 간부들은 현실을 움직이는 것으로 보되 변혁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4.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노동조합 간부는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활동해야 합니다. 작년 임투와 올해 임투는 다릅니다. 사용자의 자세가 달라졌고 주변 정세가 달라졌고, 그래서 조합원의 요구가 달라졌습니다. 똑같은 투쟁은 두 번 다시 없습니다. 그러기에 창의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노동조합의 경험, 다른 노동조합의 경험, 또는 다른 나라 노동조합의 경험에서 노동운동의 원칙을 끌어내야 합니다. 노동운동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원칙은 무수한 투쟁의 경험을 통해서 다다른 공통의 결론이고 교훈입니다. 노동운동은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간부의 머리 속에서 창의성을 짜낼 것이 아니라 대중 토의를 통해서 창의성을 높여 내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 할지라도 대중 토의를 통해서 나온 창의적인 방법이나 현실적인 판단을 쫓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소중히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중시하지 않으면 권위주의자가 됩니다. 개인의 판단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미 문제가 있으면 해결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조합 운동가에게는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바람이 부는 날이 있으면 잔잔한 날도 있습니다. 별빛조차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이 있는가 하면 보름달 환히 비추는 환한 밤도 있습니다. 지금은 어렵고 조합원들도 자신 없어 하더라도 상황은 언제든지 달라집니다. 세상은 변화하고 발전합니다. 이것을 명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5. 민주적인 태도를 갖자
노조 활동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권위주의적 자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민주적인 집행부가 들어선 경우에는 덜합니다만, 1987년 이전의 노동조합 간부들은 대부분 권위주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투부터 달랐습니다. 조합원을‘우리 애들’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이런 간부들이 많습니다. 조합 사무실은 호화로웠습니다. 어떤 노동조합에서는 조합원들이 위원장을 노무담당 상무로 착각하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위원장이 조합 사무실보다는 관리 사무실에 더 많이 가 있고, 시간이 나더라도 현장보다는 밖으로 나돌아다니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입니다. 과거 연맹 위원장이면서 단위 조합 위원장이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월급에서부터 모든 것을 상무이사 급으로 대우받았습니다. 회사에서 차도 대주고 운전사도 대주었습니다. 이런 정도였으니 조합원들이 위원장을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지금 민주노조라 불리는 노동조합의 간부 중에서도 일상 생활이 민주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특히 부인들에게 하는 것을 보면 전혀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권위주의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계급사회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힘이 센 사람이 큰소리치고 특권을 누리는 사회이다 보니, 자연히 지배계급의 위치에서는 권위주의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권위주의를 가지고 유지될 수 있는 조직이 아닙니다. 노동조합은 대중조직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참여가 없으면 힘이 만들어질 수 없는 조직입니다. 물론 지도자가 권위가 있어야 하지만 스스로 권위를 부린다고 권위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대중조직의 지도자는 조합원 대중이 권위를 부여해 줄 때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지도자는 민주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6.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자
민주주의는 비판을 보장하고 허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조합원들의 비판에 대해 변명만을 늘어놓거나 반발하는 간부가 있는데, 이런 사람은 지도자가 될 자질이 없습니다.
노보의 첫 면 맨 위를 위원장 사진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이는 위원장의 사진을 꼭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노보의 위원장 사진을 보면서, 전두환 정권 시절에 우리가 9시 뉴스를 보면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운동권의 병폐 가운데 하나가‘서로 대강 봐주기’입니다. 그렇지만 서로에 대한 비판이 없으면 조직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남이 자기에게 이야기 해 주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하는 잘못을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애정 있는 비판이 필요합니다. 비판이야말로 권위주의를 없애는 가장 훌륭한 수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매개가 있어야 합니다. 뒷자리에서 어떤 사람에 대한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식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상집 회의, 대의원회, 현장소모임 등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사업과 활동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7. 노동 대중에게 헌신하는 자세를 갖자
간부는 헌신성이 있어야 합니다. 조합 간부의 헌신성이 없으면 지도 역량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헌신성은 개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대중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로부터 시작됩니다. 동료들의 어려움, 고통을 잘 알고 대중으로부터 투쟁성, 창의성을 배우는 가운데서 헌신성은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노동 대중의 상태, 요구, 의식을 직접 부닥쳐서 조사하고 경험하면서 헌신성이 높아집니다.“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도 있구나.”라고 자각할 때 헌신성은 높아지게 됩니다. 같은 공장의 울타리 안에서 근무하는 사내 하청 노동자들을 같은 동료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구호를 외칠 때는‘노동자는 하나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종 집회나 투쟁하는 사업장을 방문하면서 이런 생각은 바뀌게 됩니다. 완성차 노동자들이 부품 공장에 가서 보면서 배우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우리는 그래도 여기에 비하면 훨씬 낫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영세 사업장, 하청·용역회사 소속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게 되면서, 열심히 활동하는 출발점으로 삼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비판을 두려워해서는 헌신성이 나올 수 없습니다. 비판을 올바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 형제들에 대한 수탈, 억압, 탄압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증오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노동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투쟁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헌신성이 나올 수 없습니다.
8. 노동자의 도덕성을 갖추자
노동자적인 도덕성을 갖춘다는 것은 우선‘예의바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이 이야기는 마치 봉건 질서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현실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일반 대중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문제, 그들이 좋아하는 문제를 인정하면서 개혁할 생각을 해야지 이것을 무시해서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 사회의 도덕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을 전적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인정해야만 하는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대중은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반면에 대중의 전근대성과 봉건성은 활동과 실천을 통해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교육장에 가서도 밤새도록 술 마시고 화투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부인에게는 독재자로 군림합니다. 나쁜 습관과 행동은 모두의 활동과 투쟁을 통해 극복해 나가려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도덕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배세력이 바라는 도덕이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충효는 뭡니까? 지배세력에게 도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삼강오륜’이라는 것은 기존의 질서와 윤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도덕입니다.
우리 노동자들이 강조하는 도덕은 무엇입니까? 동료애입니다. 동료애에 바탕을 둔 단결은 튼튼합니다. 불의에 대한 항거, 사실에 근거한 비판 정신,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 등이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도덕입니다.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이런 도덕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형식적인 도덕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노동조합 간부들에게는 이런 도덕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의 품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노동자는 우선 소박합니다. 작업복이 편하고 포장마차가 어울리는 그런 소박함입니다. 그리고 솔직합니다. 그리고 비굴하지 않지만 겸손합니다. 또한 성실하고 용감합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개발하고 다듬어야 할 품성입니다. 간부들이 가져야 할 품성은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좋은 품성들을 더 가다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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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맨님의 댓글
레인맨 작성일미나리 아자씨 겁나게 좋아지고 있네 그랴~~역시 해독을 시키는 미나리 특유의 악효를 발휘하지 않나 싶은데 음~~조타 하겠습니다 그랴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것 하나 두산중노조 찢어진 난닝구 벗는것이 노동조합 간부의 최우선 자세다 하겠습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