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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단결투쟁 당당하게 현장속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
작성자 레인맨
댓글 3건 조회 956회 작성일 2005-01-12

본문

아래는 제가 이앞전 올리려던 글입니다 (정도상 이라는 친구가 2003년경에 쓴글임) 아랫글에 나오는 친구는  제가 지난 젊은시절 그러니까 20년전  서울 구로동에 있는 상록독서회에서 만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이친구는 저와 별로 친하지 않는 그냥 독서회에서  수인사만 하는 친구 이었지요..최근 창원 한진중공업 유명을 달리한 비정규 노동자 김춘봉님의 소식을 접하고 저는 죽음으로 자신의 뜻을 대변하는 분들이 생길땐  저는 자괴감에 침묵을 합니다..

왜냐면...저는 어느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지난 80년 광주에서 형님들과 벗들이 독재자의 총칼에 어떻게 살육 당했는지 똑똑히 지켜 봤으며 .제가 격은 숱한 비정규 노동자라는 개념조차 없는 지난 시절 선원생활 노가다 현장 등지에서 기층의 민중이  바다의 고기밥과 현장의 피떡이 되는 죽음을 자의반 타의반  당했지만 소위 개값 취급도 못받고 이 한많은 세상을 등진 노동자를 많이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익과 목소리를 이만큼 신장 시킨것은 분명 민주노총의 헌신과 투쟁의 역사와 노동자의 든든한 버팀복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점 인정하고 존중 합니다 하지만 민주노총 노동자를 위한 권익 단체로 커다랗게 성장했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투쟁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민주노총과 긍극의 노동자를 위한  뜻과 성취는  같지만 다른길을 가고자 합니다..

 이앞전 새길벗님이 말씀하셨고 이소선 여사님이 말씀하신 "살아서 싸워야 돼. 죽으면 지는 거야. 살아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 만들어야 돼." 이제 노동자들의 구호는 ’더이상 죽이지 마라."가 아니라 "죽지 마라"여야 한다. 제발 이제는 죽음으로 항거하지 마라! 그래야 세상이 변한다.“ 다시한번 되새기며 다시는 이땅에서  죽음으로 자신의 뜻을 대변하고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하시는 노동자가 없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아 래-


살아야 하는 이유 !

13일은 전태일 열사의 33주기가 되는 날이다. 전태일열사가 분신했던 바로 그해에 태어난 아이라면 지금 예수가 죽던 나이와 똑같아지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얘깃거리를 붙여서 추념에 대한 그럴듯한 포장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최근 노동자들의 분신이 잇따르고 노-정간의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면서 정권도 바뀌고 노동환경도 많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것이 있는 것 같아 착잡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워 진다.

지난 9월 하순경 필자가 있는 사무실로 박영진열사의 여동생 박현희씨가 찾아왔다. 올해 들어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박영진열사에 대한 보상 결정이 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노동열사들의 전기를 출간하는데 자료가 필요해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박영진열사 전기는 소설가 정도상씨가 ’천만개의 불꽃으로 타올라라’란 제목으로 출간한 바 있다. 이번에도 아마 소설 형식으로 나올 듯하다.

내가 영진이를 만난 것은 83년 봄 야학에서 였고 그가 분신한 것은 86년 봄이었으니까 만난지는 20년이 조금 넘는다. 그 해 3월 영진이는 방위복을 입은 채 교실에 처음 들어섰다. 불쑥 들어선 그의 생경함이라니... 그 당시 나는 군복 비슷한 색깔만봐도 가슴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만큼 경직되어 있을 때였으므로 그의 출현은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는 그렇게 바삐 왔다가 바삐 간 것만 같다. 짧은 삶이었다.

그 후의 과정이라는 것은 말이 의식화지 사실은 서로의 계급성이란 벽을 허물어뜨리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벌판에 던져진 풀씨 같았다. 온갖 비바람을 견디고 살아남아야 하는 그런 존재였다. 교과서가 무슨 소용인가. 아무에게도 정답은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의심했다. 무엇보다도 그 알량한 기득권을 지니고 살아가는 나 자신이 미웠고, 부끄러웠다. 그당시 우리에게는 자본과 군부독재라는 ’적’에 앞서 자신에게 들어있는 ’허위’라는 적과 싸워야 했다. 고뇌, 때로는 자조를 마치 폭탄처럼 껴안고 견디다 못해 몸부림을 치곤 했다.

그리고 꼭 3년 후 그와의 벽이 조금 허물어졌는가 했는데 영진이는 "태일이 형 이루지 못한 일 다하려고 하였더니 못하고 간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먼저 갔다. 그 말은 꼭 ’너도 곧 뒤따라 오라’는 말로 들렸다. 실제로 지난 20년 가까이 나의 뒷덜미를 늘 붙잡고 있었던 것은 바로 영진이의 바로 그말이었던 같다. 그래서 나는 최근 어떤 인터뷰에서도 고백한 바와 같이 의식화야햑 교사였지만 사실 내가 의식화 되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현희씨와 나눈 인터뷰의 알맹이는 그런 ’후일담’은 아니었다. 인터뷰이긴 했지만 매년 추모제나 송년회 때면 만나곤 하는 사이였으므로 그런 얘기는 이미 다 아는 새삼스런 얘기였다. 그때 나는 아마도 현희씨에게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을 얘기를 했다. 아아, 내가 그런 말을 하다니! 현희씨가 가고 난 후 나는 얼마나 후회하고 또 후회했던가. 가슴이 아팠다. 내가 영진이의 죽음에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내가 영진이의 죽음에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이었던가.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이제 그런 말을 해야 했다. 이제 영진이는 단지 나에게 짐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긍정적인 에너지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영진이는 이제 빚쟁이가 아니다. 영진이는 죽어서 내 뒷다리나 붙잡는 그런 부정적 에너지가 아니라 늘 나와 대화하는 살아 숨쉬는 화두여야 한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노동열사의 정신’은 따로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독한 마음을 먹기로 작정했다.

내가 말한 골자는 이랬다. "가령 박종철열사는 타살자와 피살자가 분명하다. 그는 전투 중에 피살당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죽음이 저항의 표시여서는 안된다. 살아야 할 이유보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강조되서는 안된다. 이건 엄청난 차이다. 모든 운동의 목표는 긍정적 변화이다. 그렇다면 긍정의 힘을 채우지 않고 어떻게 목표를 향하여 갈 수 있겠는가. 긍정의 힘에 대한 포기는 운동에 대한 포기나 마찬가지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노동열사’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었다. 모두들 ’노동열사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정서가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던 터에 이것은 분명 브레이크요, 배반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서는 안된다.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을 그렇게 보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오늘 전태일열사 33주기를 맞는 심정은 그래서 더욱 착잡하기만 하다.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

올해는 유난히 노동자들의 분신이 많았다. 지난 이른 봄 배달호 노동자의 분신 이후로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는 분명히 사회적 타살이다. 그러나 적어도 노동자들의 사회적 타살에 진단에서는 노동자들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니라 그러한 조건과 싸우는 긍정적 에너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1월 9일 시청앞 광장에서 있었던 노동자대회의 구호는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또 노무현정권을 향한 규탄의 구호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죽어야 하는가"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열사정신 계승"은 죽음의 치열함이 아니라 살아서 싸워야 하는 이유여야 한다. 그것이 열사를 살리는 길 아닐까.

죽음이 어찌 노동자들만의 것인가. 올해는 카드빚 때문에, 입시 압박때문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도 일가족이... 그런데도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고 타워팰리스 주민들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끽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있다. 그만큼 사회적 타살 요인이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부정적 요인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이유가 강조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절대로 사회적 타살 요인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노동자들이 이 사회의 중심에 서고자 한다면 삶의 긍정적 에너지를 확산시키는 펌프가 되어야 한다.

더구나 노동자들은 살아야 하는 이유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답해야 한다. 최근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자살은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정신적 자세와 관계되는 것이다. 자살이 사회 문제로 떠오를 정도로 빈번해진다면 그것은 분명 그 사회에 팽배해 있는 가치관이 잘못돼 있다는 증거다. 삶에 대한 기대와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과 여건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괴리가 생길 때 사람들은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크게 본다면 우리의 사회적 병리는 물질만능주의적 사회 분위기와 영적 삶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좀 더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범주로 좁혀서 본다면 개개인을 자살로 몰고 갈 정도로 심각한 좌절감을 낳게 하는 사상적 오류는 우리의 지성계와 교육계에 팽배해 있는 맹목적 평등주의에 대한 물신숭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인호 2003.11.10 동아)

한마디로 자기 능력(분수!)을 모르고 욕망을 꿈꾸다 절망에 부닥치자 극단적인 길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등주의와 교육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주류의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의 한 단면이라고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 한 논객은 다음과 같이 반격한다. "보통의 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회가 수험생을 자살로 몰아갔고 또 어디에도 호소할 곳 없는 억울한 노동자를 희생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의 죽음이 <사회적 타살>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우긴다... 그 동안 이 땅을 지배해온 자들이 누구인가? 독점적 지배구조를 가진 경제계,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만을 가르쳐온 교육계, 온갖 부정을 저질러온 정치계를 누가 지배해 왔는가? 그들이 세운 정권 밑에서 잉태된 모든 악의 씨앗이 자라나 성장한 결과로 지금과 같은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관점의 간극은 사실 구조결정론과 기능론의 차이로써 사회학의 오랜 숙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대립을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만한 전망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사회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의 대립은 역사적으로 늘 대립해 왔다. 그러한 팽팽한 대립을 해결하는 길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삶으로 증명하는 것밖에 없을 것 같다. 그 대립이 아무리 감당하기 힘들고 모질더라도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부정적 이유가 근거로 작용해서는 안된다.

과연 노동자들은 맹목적 평등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타당성에 관계없이 한가지 분명한 것은 노동자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담론의 핵심은 결국 욕망의 문제와 귀결된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욕망의 문제에 대해서 답해야 한다. 이제 삶의 문제에 대해서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박한가? 벼랑 끝에 몰려있는 노동자들에게 너무 낭만적인 요구인가? 그렇지 않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욱 살아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 열사 33주기를 맞는 의미일 것 같다. 이제 전태일 열사가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여야 한다. 누구나 그렇게 말할 것이다. "누구는 죽고 싶어서 죽느냐..." 노동자들은 몽둥이와 최루탄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스스로 죽음은 저항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제 자본과 노동과의 관계를 바로 잡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존을 높이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힘을 충만시키는 운동이다. 긍정적 기운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열사들에게서 계승해야 할 정신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은 열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로 스스로 죽지 않는 노동자가 필요한 것이다.

노동자의 어머니, 칠순을 훨씬 넘긴 이소선 여사의 말이 가슴에 꽂힌다. "살아서 싸워야 돼. 죽으면 지는 거야. 살아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 만들어야 돼." 이제 노동자들의 구호는 ’더이상 죽이지 마라."가 아니라 "죽지 마라"여야 한다. 제발 이제는 죽음으로 항거하지 마라! 그래야 세상이 변한다.
 

레인맨 http://3win.org

댓글목록

레인맨님의 댓글

레인맨 작성일

  덧붙여: 저에게는 어떠한 잡설과 노동타령으로 설득시키려 하지 마십시요. 저는 지난날들을 못배워 쳐먹어 숱한 눈치밥과 조카튼 세월들을 보냈기 때문에 뭐가 옳은지 틀린지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42세라는  나이와 노동자 자영업자 사용자 생활을 껵으면서 이들의 진실을 조금은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홈피 관리자는 IT기술로 장난 치지 말기를  부탁합니다...저는 IT와 네티즌의 정체성에  관해선 어느정도 궤뚫고 있다고 자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러여인님의 댓글

러여인 작성일

  미친세키 지-랄하고 자빠젼네 그리 할일이 웁나~ 삥신아

레인맨님의 댓글

레인맨 작성일

  러여인같은  틀어진 애들이 두산중 귀곡산장에 기생하고 있는바 저는 이딴애들을 사채업자 새꺄들로 보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절대 저러지 않다는게 저의 지난 인생경험에서 얻은 시각 입니다 ..노동자의 돈을 사취 하려는 간악한 자들만이 저런 사특하고 삐틀어진 시각을 갖고 있다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