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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단결투쟁 당당하게 현장속으로
*** 90 년 그 혹독했던 고문을 기억하며...., 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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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2회 작성일 201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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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법 좀...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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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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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90 년 7 월 26 일 마산 회원 교도소 내 에서, 교도소 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는 민주화 동지들이 , ( 그 당시 우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 경남의 민주화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새로 부임한 " 안 유 " 보안과장 ) 에 의해 , 고문과 폭력을 당하며 , 어렵게 투쟁을 한다는 것을 그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 며칠 전날에는 현 , 마산 ( 열린 우리당 위원장 인 " 김 성 진 씨 ) 등이, 그곳 교도소를 항의 방문했었다가 , 온 몸에 시퍼런 상처를 입고 돌아 온 것을 본 후 , 그 전 부터 교도소의 폭력적인 야만성을 더 알고 있었던 저는 ( 당시 진해의 한 하청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던 현장에서 오전 일을 마치고 ) 회원교도소로 달려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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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가 오후 두 시 즘 그곳에 도착을 했었을 때 사항은 , 교도소 면회소 입구에는 소측이 바리게이트를 쳐 놓고 , 육 칠 십 명의 교도관 과 경비 교대원 들이 막고 있었고 , 면회실 뒤 쪽 에서는 키가 작으만 " 안 유 " 보안과장이 지시를 계속 내리고 있었으며, 반면에 우리 쪽에서는 여성 동지들 칠 팔 명 과 그 가족들 등 열 명 남짓 포함한 분들이 , 단식투쟁을 하는 동지들에게 면회를 신청할 수 없도록, 소측에서 면회금지를 시킨 것과 , 그리고 교도소 내에서 흘러나오는 폭력 과 고문에 항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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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간 그 날 저는 한 시간 여 간 , 그곳의 모든 분들과 항의를 하였다가 , " 특수공무방해죄로 구속되어 9 개 월 " 살게 되었습니다 . ( 그 당시 저의 죄란 , 단순한 항의에 불과 했었는데 , 교도소 측에서는 밖에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이 항의하는 날들이 거세 지자 , 교도소 측은 밖에 힘을 떨어트리기 위해 그 날 저 와 한 시간 후 , 정 민 수 동지를 잡아넣었던 것이라고 저이들은 그 당시 판단 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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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가 구속되고 , 저로서는 가을에 두 번째 단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무기한 단식 이유는 " 안 유 보안과장은 ( 우리와의 약속을 했다가 , 그 다음 날이면 깨 버리는 비겁한 짓을 번벅 하였기 때문에 , 한 번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우리는 9 월 달 가을 경 에 또 한 번의 무기한 단식을 하는 6 일 째 되는 날 , ( 그 당시 보안과장은 또, 우리들을 외부와 차단 시키기 위해 일체의 면회를 금지 시키고 있었습니다 . 그러던 그날 전 세 중 동지가 변호사 특별 면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었을 때 , 우리들의 입장을 변호사에게 알리려고, 밤 샘 작성한 문건들을 소지하고 접견실로 가려고 했었을 ) 때, 저가 있던 9 사 1 방 입구에서 교도관들에게 강제로 몸 수색일 받고 고무신에 소지하고 있던 문건을 뺏기는 일이 일어 낳었습니다 . 저는 그 때 방안에 창틀에 얼굴을 대밀고 항의를 했었습니다 . 그 이유는 , 소측이 그 당시 까지 했던 모든 행위가, 인권으로 봤을 때 너무 살인적인 폭력 이어서 , 억눌렸던 마음까지 합쳐 그에 대해 항의를 했었는 데 , 그 때 " 문 아무개 ? " 교도관은 오히려 욕설로 저를 제지를 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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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까지 저가 느낀 것은 , 6 일 동안의 무기한 단식을 하는 그 사항까지 오도록 , 교도소측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 안 유 ) 보안과장은 그 어떠한 성의를 보이기는 커녕 폭력 과 고문으로 우리들을 대하여 왔기에 , 저는 그 야만적인 행위에, 항의 의 뜻으로 ( 창살 유리를 깨고 , 유리로 저의 왼 손 팔목의 동맥을 끊고 , 다음은 배 살을 긋는 ? )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협상은 커녕 교도소측은 , 오히려 저를 지하 고문실 로 끌고 들어가 두 시간 여 동안 고문 을 일삼은 뒤 , 다시 징벌 먹 방으로 데려가 이 십 삼 일 간 깡패들을 동원해 고문을 자행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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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당시 저가 당한 고문은 , 처음 날에는 지하 고문 실에서 , 두 시간 여 , " 일명 통닭고문 " 을 한 뒤 , 다음은 징 벌 먹 방 으로 끌고 간 후 , 다시 2 3 일 간 사지를 움직이지 못한 채 , 잠을 제대로 재우지 않는 고문을 자행했었는 데 , 그 것도 그 당시 여름 즘 " 일명 마산 폭력조직 돼지파 두목 " 이 검거되어 잡혀온 그 사람과 , 또 한 그의 마산 대 선배인 등치 큰 깡패를 의도로 그들과 짜고 ( ? ) 내가 있는 방으로 고의로 집어넣고 그들에겐 , 낮이나 밤이나 대자로 누워 편히 쉬게 해 줄 뿐만 아니라 , 그곳에서는 금지가 되어있는 사식을 그것도 매일 마다 ( 훈제 닭다리 ) 등 , 뿐 만 아니라 , 담배까지 밖으로 불러내어 피게 해주었고 , 또 그런가 하면 , 그 당시 마산 창원 등의 그 선 후 배 한 두 명을 그곳으로 들여보내어 , 3 ~ 5 일 정도 씩 돌아가며 집어넣었다 빼내는 , 아주 , 고도로 교활하고 무서운 고문으로 저의 몸을 압박하게 끔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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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징벌 먹 방 은 화장실까지 합쳐 1 . 2 평 이였는데 , 정원이 한 명 정도를 집어넣는 그 곳에 , 최고 다섯 명까지 집어넣은 후 낮에 뿐만 아니라 , 저의 다리를 펴지 못하도록 화장실 변기에 박스를 깔고 쭈그리고 앉아서 있도록 하였고 , 밤에는 더욱 잠을 제대로 못 자도록 다리 와 상체를 오므리고 앉아서 있도록 하는 고문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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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도 처음은 소 측과 약속이 그곳에서 1 5 일 간 있기로 합의를 내가 징벌 먹방으로 들어간 이틀 후 소측과 합의를 봤다고 전 세 중 동지가 나를 만나로 와서 그런 줄 알았는데 , " 안 유 보안과장 " 은 그것 마저도 어겼었습니다 . 보름 되는 날 그 날 까지 " 안 유 보안과장 " 은 그곳 징벌 먹방으로 와 나를 보기 ( ? ) 위해 두 번 왔었는데 , 1 5 일이 되는 그 날 도 왔었다가 내게 이렇게 물었었습니다 . 하여간 그 날 , 그가 원하는 말을 내가 적절히 ( ? ) 해주지 않은 것에 화가 난 보안과장은 , 나를 그곳에서 8 일을 더 있게 연장 을 했었던 것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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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그때 미소를 지으며 빈정거리며 내게 물었던 말은 이 말이었습니다 .
> " 박 창 석 ! 이제 정신 좀 차리고 , 반성 많이 했나 ? " 라고 , 한 말이었는데 ,
> 저는 그 말에 ,
> " 보안과장 님 . 아무리 생각해도 , 내가 정신을 못 차린 적도 없었고 , 또한 , 어떠한 반성을 그 누구에게 할 것이 없는데 , 나더러 뭘 , 누구에게 반성하고 정신을 차리란 말이요 ? " 라고 , 답했을 때, 키가 짜리 몽땅한 보안과장은 자신이 요구했던 대답과는 내 대답이 정 반대로 마음에 차지 않자 .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되어 자신의 부하에게 철문을 빨리 닫아 버리라고 비명 지르듯 고함을 내 지른 뒤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간 그 이후 " 안 유 보안과장 " 은 나에게 8 일을 더욱 잠을 안 재우고 사지를 못쓰게 하는 고문을 , 그곳에서 더 자행했던 것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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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미한 초코등 빛에 공기마저 잠들어버린 밀폐된 그곳에서 , " 안 유 보안과장 " 은 내게 그렇게 하면 그 이후 , 내게 그 어떠한 후유증이 발생하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고문을 자행 했었던 것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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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그곳에서 2 3 일 동안 있으면서, 완전히 미쳐서 그곳에서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 그 당시부터 생긴 우울증 과 다음 날 동지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 간 뒤 평소 우리가 아침에 체력단련을 위해 하던 무릎 굽히기 운동을 내가 3 회 한 뒤에, 나의 온 몸 마디마디 굳어버린 관절 중 오른 쪽 무릎 관절 앞 뒤로 , 심한 통증이 발생 된 뒤로, 저는 그 해 겨울은 , 관절이 찌저져 나가는 통증 때문에 너무도 견뒤기 힘든 겨울이 되었고 , 그 후 출소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경기도 부천에 올라가서는 , 무릎 통증이 생길 때마다 , 더욱 그 당시의 그 악 날 한 고문의 흔적들을 나도 모르게 찾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 출소 후에는 ( 우울증에 이어 조울증 이 란 병명이 더 늘어 " 양극성 장애 " ) 라는 , 정신병을 더 같게 되었는데 , 그 때 부 터 저는 십 년 가까이 나도 잊어버리고 ,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채 , 전국의 정신병원을 여 덜 번이나 돌아가며 전전하며 들락거리다 , 2 0 0 2 년 6 월 정신을 깨고 지금껏 살아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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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그 때 고문으로 , 다리의 관절 뿐 아니라 정신적인 병을 , 나의 의지와 인내로 치유 했다고는 하지만 , 그 전과 다르게 평소에도, 남들처럼 오랫동안 달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 겨울이면 더욱 통증이 동반되고 머리가 어지럽록 심한 이명이 내 귀에 울림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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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삼스럽게 기억이 나는 군요 ? 그 당시 징벌 먹방에서 풀려 난 후 , 11 월 달 경 이었습니다 . 절룩거리며 운동장을 걷고 있었을 때 , 그 돼지파 두목의 선배라는 분이 ( 한 번 도 대 운동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후에도 그 분을 그 운동장에서 볼 수가 없었슴 ) 철 봉대에 손을 올려 놓고 오래도록 나를 기다린 듯 , 내가 다가가자 고개만 내게 힐끗 돌린 채 ,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다시 머리를 재 자리로 돌린 후 내게,
> " 시 호 야 . 미안하다 . 어쩔 수 없었어... 다음에 밖에서 보면 내가 한 잔 살 깨 ..., " 라고 , 힘없이 말한 뒤 , 철봉대를 놓고 그곳을 떠나는 , 그 사람의 진실한 양심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분의 뒷모습에 대고 해주었던 말은 ,
> " 형님 . 다 알고 있었습니다. 첫날 부터요 . 그래요 형님 ! 다음에 밖에서 만나면 반가운 얼굴로 한 잔 해요 ? " 라고 , 말을 해주었었는데 , 그 분은 내게 너무 미안했는지 , 대답대신 고개를 더욱 수그린채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이 지금도 내 오래된 기억인데도 , 너무나 생생이 지어지지 않고 생각이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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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두 분들은 지금이라도 만나려 한다면 시간 문제 이겠지만 ,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이 내겐 너무 많이 남아 있기에 , 그 분들을 지금껏 못 만나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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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한 세월은 흘러 지금 , 사 십을 훌쩍 넘겨버린 내 나이에 내가 그전에 알고 지냈던 그 시퍼런 청춘의 후배들도 , 아빠가 되어 살아가는 이 때 , 과연 그 긴 시간동안 남들처럼 ( ? ) 적어도 , " 여보 ? " 라고 , 내가 불러 주고 싶은 여인과 , 초롱 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과 처는 한 번 가져 보지 못했기에 없고 , 길가를 걷다가 문뜩 ?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 아장아장 걷는 고사리 손을 가진 아이만 보아도 나는 뭉클해 지는 마음에 껴안아 주고싶어지는 내겐, 지금 단돈 3 ~ 4 만 원 짜리 자그마한 내 안식이 될 방한 칸 짜리 공간도 갖지 못하여 , 금새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시골 빈집들을 두 번이나 전전하는 지금 . 그래도 남모르게 숨겨보고 싶은 것은 , 1 5 년 동 안 나도 모르게 하야케 쉬어버린 머리에 , 가끔 염색약을 바를 땐 더욱더 몸서리치도록 소름이 끼쳐지는 내 모습을 남이 알까바 살며시 숨겨 봅니다 .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나의 시간들 , 정적 마저 숨어버린 나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 지금 이 시각 이 나라를 지금까지 좌지우지 해 왔던 그때의 위정자와 , 현 국가의 권력은 그 어떤 보상으로 나를 달랜단 말인지 정말 , 묻고 싶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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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 시 호 는 , 저의 그 전 부터 쓰던 필명이고, 본명은 박 창 석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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