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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단결투쟁 당당하게 현장속으로
*** 90 년 그 혹독했던 고문을 기억하며...., 교정 ?
작성자 박시호
댓글 1건 조회 1,123회 작성일 2005-01-02

본문

*** 교정 ***


저는 90 년 7 월 26 일 마산 회원 교도소 내 에서, 교도소 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는 민주화 동지들이 , ( 그 당시 우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 경남의 민주화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새로 부임한 " 안 유 " 보안과장 ) 에 의해 , 고문과 폭력을 당하며 , 어렵게 투쟁을 한다는 것을 그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 며칠 전날에는 현 , 마산 ( 열린 우리당 위원장 인 " 김 성 진 씨 ) 등이, 그곳 교도소를 항의 방문했었다가 , 온 몸에 시퍼런 상처를 입고 돌아 온 것을 본 후 , 그 전 부터 교도소의 폭력적인 야만성을 더 알고 있었던 저는 ( 당시 진해의 한 하청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던 현장에서 오전 일을 마치고 ) 회원교도소로 달려갔었습니다.

저가 오후 두 시 즘 그곳에 도착을 했었을 때 사항은 , 교도소 면회소 입구에는 소측이 바리게이트를 쳐 놓고 , 육 칠 십 명의 교도관 과 경비 교대원 들이 막고 있었고 , 면회실 뒤 쪽 에서는 키가 작으만 " 안 유 " 보안과장이 지시를 계속 내리고 있었으며, 반면에 우리 쪽에서는 여성 동지들 칠 팔 명 과 그 가족들 등 열 명 남짓 포함한 분들이 , 단식투쟁을 하는 동지들에게 면회를 신청할 수 없도록, 소측에서 면회금지를 시킨 것과 , 그리고 교도소 내에서 흘러나오는 폭력 과 고문에 항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여간 그 날 저는 한 시간 여 간 , 그곳의 모든 분들과 항의를 하였다가 , " 특수공무방해죄로 구속되어 9 개 월 " 살게 되었습니다 . ( 그 당시 저의 죄란 , 단순한 항의에 불과 했었는데 , 교도소 측에서는 밖에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이 항의하는 날들이 거세 지자 , 교도소 측은 밖에 힘을 떨어트리기 위해 그 날 저 와 한 시간 후 , 정 민 수 동지를 잡아넣었던 것이라고 저이들은 그 당시 판단 을 했었습니다.

저가 구속되고 , 저로서는 가을에 두 번째 단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무기한 단식 이유는 " 안 유 보안과장은 ( 우리와의 약속을 했다가 , 그 다음 날이면 깨 버리는 비겁한 짓을 번벅 하였기 때문에 , 한 번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우리는 9 월 달 가을 경 에 또 한 번의 무기한 단식을 하는 6 일 째 되는 날 , ( 그 당시 보안과장은 또, 우리들을 외부와 차단 시키기 위해 일체의 면회를 금지 시키고 있었습니다 . 그러던 그날 전 세 중 동지가 변호사 특별 면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었을 때 , 우리들의 입장을 변호사에게 알리려고, 밤 샘 작성한 문건들을 소지하고 접견실로 가려고 했었을 ) 때, 저가 있던 9 사 1 방 입구에서 교도관들에게 강제로 몸 수색일 받고 고무신에 소지하고 있던 문건을 뺏기는 일이 일어 낳었습니다 . 저는 그 때 방안에 창틀에 얼굴을 대밀고 항의를 했었습니다 . 그 이유는 , 소측이 그 당시 까지 했던 모든 행위가, 인권으로 봤을 때 너무 살인적인 폭력 이어서 , 억눌렸던 마음까지 합쳐 그에 대해 항의를 했었는 데 , 그 때 " 문 아무개 ? " 교도관은 오히려 욕설로 저를 제지를 했었습니다 .

그 날까지 저가 느낀 것은 , 6 일 동안의 무기한 단식을 하는 그 사항까지 오도록 , 교도소측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 안 유 ) 보안과장은 그 어떠한 성의를 보이기는 커녕 폭력 과 고문으로 우리들을 대하여 왔기에 , 저는 그 야만적인 행위에, 항의 의 뜻으로 ( 창살 유리를 깨고 , 유리로 저의 왼 손 팔목의 동맥을 끊고 , 다음은 배 살을 긋는 ? )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협상은 커녕 교도소측은 , 오히려 저를 지하 고문실 로 끌고 들어가 두 시간 여 동안 고문 을 일삼은 뒤 , 다시 징벌 먹 방으로 데려가 이 십 삼 일 간 깡패들을 동원해 고문을 자행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가 당한 고문은 , 처음 날에는 지하 고문 실에서 , 두 시간 여 , " 일명 통닭고문 " 을 한 뒤 , 다음은 징 벌 먹 방 으로 끌고 간 후 , 다시 2 3 일 간 사지를 움직이지 못한 채 , 잠을 제대로 재우지 않는 고문을 자행했었는 데 , 그 것도 그 당시 여름 즘 " 일명 마산 폭력조직 돼지파 두목 " 이 검거되어 잡혀온 그 사람과 , 또 한 그의 마산 대 선배인 등치 큰 깡패를 의도로 그들과 짜고 ( ? ) 내가 있는 방으로 고의로 집어넣고 그들에겐 , 낮이나 밤이나 대자로 누워 편히 쉬게 해 줄 뿐만 아니라 , 그곳에서는 금지가 되어있는 사식을 그것도 매일 마다 ( 훈제 닭다리 ) 등 , 뿐 만 아니라 , 담배까지 밖으로 불러내어 피게 해주었고 , 또 그런가 하면 , 그 당시 마산 창원 등의 그 선 후 배 한 두 명을 그곳으로 들여보내어 , 3 ~ 5 일 정도 씩 돌아가며 집어넣었다 빼내는 , 아주 , 고도로 교활하고 무서운 고문으로 저의 몸을 압박하게 끔 하였습니다 .

그 징벌 먹 방 은 화장실까지 합쳐 1 . 2 평 이였는데 , 정원이 한 명 정도를 집어넣는 그 곳에 , 최고 다섯 명까지 집어넣은 후 낮에 뿐만 아니라 , 저의 다리를 펴지 못하도록 화장실 변기에 박스를 깔고 쭈그리고 앉아서 있도록 하였고 , 밤에는 더욱 잠을 제대로 못 자도록 다리 와 상체를 오므리고 앉아서 있도록 하는 고문이었습니다 .

그것도 처음은 소 측과 약속이 그곳에서 1 5 일 간 있기로 합의를 내가 징벌 먹방으로 들어간 이틀 후 소측과 합의를 봤다고 전 세 중 동지가 나를 만나로 와서 그런 줄 알았는데 , " 안 유 보안과장 " 은 그것 마저도 어겼었습니다 . 보름 되는 날 그 날 까지 " 안 유 보안과장 " 은 그곳 징벌 먹방으로 와 나를 보기 ( ? ) 위해 두 번 왔었는데 , 1 5 일이 되는 그 날 도 왔었다가 내게 이렇게 물었었습니다 . 하여간 그 날 , 그가 원하는 말을 내가 적절히 ( ? ) 해주지 않은 것에 화가 난 보안과장은 , 나를 그곳에서 8 일을 더 있게 연장 을 했었던 것이었습니다 .

그가 그때 미소를 지으며 빈정거리며 내게 물었던 말은 이 말이었습니다 .
" 박 창 석 ! 이제 정신 좀 차리고 , 반성 많이 했나 ? " 라고 , 한 말이었는데 ,
저는 그 말에 ,
" 보안과장 님 . 아무리 생각해도 , 내가 정신을 못 차린 적도 없었고 , 또한 , 어떠한 반성을 그 누구에게 할 것이 없는데 , 나더러 뭘 , 누구에게 반성하고 정신을 차리란 말이요 ? " 라고 , 답했을 때, 키가 짜리 몽땅한 보안과장은 자신이 요구했던 대답과는 내 대답이 정 반대로 마음에 차지 않자 .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되어 자신의 부하에게 철문을 빨리 닫아 버리라고 비명 지르듯 고함을 내 지른 뒤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간 그 이후 " 안 유 보안과장 " 은 나에게 8 일을 더욱 잠을 안 재우고 사지를 못쓰게 하는 고문을 , 그곳에서 더 자행했던 것이었습니다 .

희미한 초코등 빛에 공기마저 잠들어버린 밀폐된 그곳에서 , " 안 유 보안과장 " 은 내게 그렇게 하면 그 이후 , 내게 그 어떠한 후유증이 발생하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고문을 자행 했었던 것이었습니다 .

저는 그곳에서 2 3 일 동안 있으면서, 완전히 미쳐서 그곳에서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 그 당시부터 생긴 우울증 과 다음 날 동지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 간 뒤 평소 우리가 아침에 체력단련을 위해 하던 무릎 굽히기 운동을 내가 3 회 한 뒤에, 나의 온 몸 마디마디 굳어버린 관절 중 오른 쪽 무릎 관절 앞 뒤로 , 심한 통증이 발생 된 뒤로, 저는 그 해 겨울은 , 관절이 찌저져 나가는 통증 때문에 너무도 견뒤기 힘든 겨울이 되었고 , 그 후 출소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경기도 부천에 올라가서는 , 무릎 통증이 생길 때마다 , 더욱 그 당시의 그 악 날 한 고문의 흔적들을 나도 모르게 찾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 출소 후에는 ( 우울증에 이어 조울증 이 란 병명이 더 늘어 " 양극성 장애 " ) 라는 , 정신병을 더 같게 되었는데 , 그 때 부 터 저는 십 년 가까이 나도 잊어버리고 ,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채 , 전국의 정신병원을 여 덜 번이나 돌아가며 전전하며 들락거리다 , 2 0 0 2 년 6 월 정신을 깨고 지금껏 살아가고 있습니다 .

아직도 그 때 고문으로 , 다리의 관절 뿐 아니라 정신적인 병을 , 나의 의지와 인내로 치유 했다고는 하지만 , 그 전과 다르게 평소에도, 남들처럼 오랫동안 달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 겨울이면 더욱 통증이 동반되고 머리가 어지럽록 심한 이명이 내 귀에 울림니다 .

새삼스럽게 기억이 나는 군요 ? 그 당시 징벌 먹방에서 풀려 난 후 , 11 월 달 경 이었습니다 . 절룩거리며 운동장을 걷고 있었을 때 , 그 돼지파 두목의 선배라는 분이 ( 한 번 도 대 운동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후에도 그 분을 그 운동장에서 볼 수가 없었슴 ) 철 봉대에 손을 올려 놓고 오래도록 나를 기다린 듯 , 내가 다가가자 고개만 내게 힐끗 돌린 채 ,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다시 머리를 재 자리로 돌린 후 내게,
" 시 호 야 . 미안하다 . 어쩔 수 없었어... 다음에 밖에서 보면 내가 한 잔 살 깨 ..., " 라고 , 힘없이 말한 뒤 , 철봉대를 놓고 그곳을 떠나는 , 그 사람의 진실한 양심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분의 뒷모습에 대고 해주었던 말은 ,
" 형님 . 다 알고 있었습니다. 첫날 부터요 . 그래요 형님 ! 다음에 밖에서 만나면 반가운 얼굴로 한 잔 해요 ? " 라고 , 말을 해주었었는데 , 그 분은 내게 너무 미안했는지 , 대답대신 고개를 더욱 수그린채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이 지금도 내 오래된 기억인데도 , 너무나 생생이 지어지지 않고 생각이 납니다 .

그 두 분들은 지금이라도 만나려 한다면 시간 문제 이겠지만 ,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이 내겐 너무 많이 남아 있기에 , 그 분들을 지금껏 못 만나보고 있습니다 .

무심한 세월은 흘러 지금 , 사 십을 훌쩍 넘겨버린 내 나이에 내가 그전에 알고 지냈던 그 시퍼런 청춘의 후배들도 , 아빠가 되어 살아가는 이 때 , 과연 그 긴 시간동안 남들처럼 ( ? ) 적어도 , " 여보 ? " 라고 , 내가 불러 주고 싶은 여인과 , 초롱 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과 처는 한 번 가져 보지 못했기에 없고 , 길가를 걷다가 문뜩 ?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 아장아장 걷는 고사리 손을 가진 아이만 보아도 나는 뭉클해 지는 마음에 껴안아 주고싶어지는 내겐, 지금 단돈 3 ~ 4 만 원 짜리 자그마한 내 안식이 될 방한 칸 짜리 공간도 갖지 못하여 , 금새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시골 빈집들을 두 번이나 전전하는 지금 . 그래도 남모르게 숨겨보고 싶은 것은 , 1 5 년 동 안 나도 모르게 하야케 쉬어버린 머리에 , 가끔 염색약을 바를 땐 더욱더 몸서리치도록 소름이 끼쳐지는 내 모습을 남이 알까바 살며시 숨겨 봅니다 .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나의 시간들 , 정적 마저 숨어버린 나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 지금 이 시각 이 나라를 지금까지 좌지우지 해 왔던 그때의 위정자와 , 현 국가의 권력은 그 어떤 보상으로 나를 달랜단 말인지 정말 , 묻고 싶어집니다 ....?

*** 박 시 호 는 , 저의 그 전 부터 쓰던 필명이고, 본명은 박 창 석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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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님의 댓글

정의 작성일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는 법입니다. 아무리 덮으려 하고 가리려해도 역사의 흐름속에 한올 한올 껍질이 벗겨져 그 나신을 드러내게 되는 법이지요. 님께서 당한 고문과 고통, 세인들은 잘 모르지만 님께서 이러한 것을 글로써 표현하고 책으로 묶어 내어 세상을 알린다면 진실은 정의에 빨리 다가올 것입니다. 힘내시고 굳굳하게 현실을 극복해 나가십시오. 세상은 혼자살기에 너무 삭막하고 지옥과 같을수도 있으나 피도 눈물도 매마른 사막같은 땅은 아닐진데, 살아가는 법을 차근히 배워가면서 또 세상의 어둠을 밀어내는 일또한 누군가 해야하기에 정의는 정의롭게 살아움직일 것입니다.새해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