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
참여마당
자유게시판
2025년 단결투쟁 당당하게 현장속으로
[지지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운동의 원칙을 지켜온 기호2번 박상철동지!
작성자 권오룡
댓글 0건 조회 1,025회 작성일 2004-12-17

본문

기호2번 수석부위원장 후보로 나선 박상철 동지는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노조 활동가들과 다른 면이 많다. 현대자동차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
사이에서 박상철 하면 독하다고 소문난 사람이다.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으며, 원칙과 소신은 운동을 처음 시작 할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사람이다. 한번 세운 원칙은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그의
의지와 활동 경력이 그 것을 말해준다.

박상철 후보가 처음 해고가 되었을 때 민주노조 운동이 한참 기지개를 켤
때인 1990년이다. 사측이 노동조합 활동에 개입을 했음을 알려주는
일명“노예문서”란 것이 있었다. 그냥 지나칠 법도 한 문건을 발견하고,
그것을 끝까지 폭로하여 회사가 노조활동에 개입했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 결과로 그에게는 천형과도 같은 4년의 해고의 결과를 낳았지만, 그는
사측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원칙을 지켜 냈다. 그 당시
현대자동차에는 여러 투쟁으로 인해 많은 해고자들이 있었지만, 유독
사측은 그에게만은 복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회사의 치부를 낱낱이
밝히고 운동의 원칙을 바로 세운 것이 죄라면 죄일 것이다.

박상철 후보는 현장활동의 한 길을 걸어왔지만,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4년 해고기간에 사측으로부터 4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은
것을 비롯하여 강경대 열사 투쟁으로 수배, 1992년 노동조합 교육부장을
맡고 있을 때 전개된 성과분배 투쟁으로 구속되어야 했다.
목숨을 건 해고자 원상회복을 위한 22일간의 쇠사슬 단식농성을 박상철
후보는 현장에 다시 복귀했지만 1995년 사측과 어용노조의 탄압에
항거하여 분신한 양봉수 열사 투쟁으로 그는 다시 구속과 해고의 아픔을
겪는 등 그의 활동은 구속과 해고가 그의 이력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4번의 수배와 4번의 해고, 구속에도 굴하지 않고 현대자동차
노동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동지가 박상철 후보이다.

박상철 후보는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앞으로의 우리 운동의 전망을
고민하고 스스로가 앞장 서 실천해 온 동지이다.
정치세력화에 대해 전망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땅에 지방자치제가
이 땅에 처음 도입되었었을 때, 그 당시에 어느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았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길을 자신이 먼저 실천해 왔다. 비록 약간의
표 차이로 낙선했지만 도의원 선거에 나가면서 노동자가 정치세력화에
앞장서야 함을 몸으로 보여 주었다. 
또한 현장 강화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믿음으로 스스로 노동조합
교육위원을 자임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박상철 후보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 속에서 항상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해고기간 동안 노동조합 대의원과
회계감사를 맡았고, 노동조합 발전을 위해 자임한 교육위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노동운동의 전망을 만들기 위해 몸으로 실천해 왔다.
어느 누구보다도 노동운동을 쉽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어려운
길을 택했고 그 선택을 한번도 후회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원칙이 바로
서지 않은 운동은 자신도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합원 대중들을
올바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이 평소 그가 생각하는 운동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도집행력이 사라진 금속연맹! 지도부만 있고 현장은 없는
금속연맹! 무너지고 파편화된 현장조직력을 하루빨리 복원시켜야 할
금속연맹!
위기의 금속연맹을 올바로 세우는 일은 현장 중심의 분명한 운동원칙과
올바른 전망을 가진 새로운 지도부가 해 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기호2번 수석부위원장 후보로 나선 박상철 동지는 18년
현장활동 경험과 조직활동 경험, 운동에 대한 분명한 원칙, 대안을
제시하는 정책능력으로 금속연맹을 바로 세우는 적임자임을 우리는
믿는다.

기호2번 수석부위원장 후보로 나선 박상철 동지는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노조 활동가들과 다른 면이 많다. 현대자동차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
사이에서 박상철 하면 독하다고 소문난 사람이다.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으며, 원칙과 소신은 운동을 처음 시작 할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사람이다. 한번 세운 원칙은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그의
의지와 활동 경력이 그 것을 말해준다.

박상철 후보가 처음 해고가 되었을 때 민주노조 운동이 한참 기지개를 켤
때인 1990년이다. 사측이 노동조합 활동에 개입을 했음을 알려주는
일명“노예문서”란 것이 있었다. 그냥 지나칠 법도 한 문건을 발견하고,
그것을 끝까지 폭로하여 회사가 노조활동에 개입했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 결과로 그에게는 천형과도 같은 4년의 해고의 결과를 낳았지만, 그는
사측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원칙을 지켜 냈다. 그 당시
현대자동차에는 여러 투쟁으로 인해 많은 해고자들이 있었지만, 유독
사측은 그에게만은 복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회사의 치부를 낱낱이
밝히고 운동의 원칙을 바로 세운 것이 죄라면 죄일 것이다.

박상철 후보는 현장활동의 한 길을 걸어왔지만,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4년 해고기간에 사측으로부터 4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은
것을 비롯하여 강경대 열사 투쟁으로 수배, 1992년 노동조합 교육부장을
맡고 있을 때 전개된 성과분배 투쟁으로 구속되어야 했다.
목숨을 건 해고자 원상회복을 위한 22일간의 쇠사슬 단식농성을 계기로
박상철 후보는 현장에 다시 복귀했지만 1995년 사측과 어용노조의 탄압에
항거하여 분신한 양봉수 열사 투쟁으로 그는 다시 구속과 해고의 아픔을
겪는 등 그의 활동은 구속과 해고가 그의 이력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4번의 수배와 4번의 해고, 구속에도 굴하지 않고 현대자동차
노동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동지가 박상철 후보이다.

박상철 후보는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앞으로의 우리 운동의 전망을
고민하고 스스로가 앞장 서 실천해 온 동지이다.
정치세력화에 대해 전망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땅에 지방자치제가
이 땅에 처음 도입되었었을 때, 그 당시에 어느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았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길을 자신이 먼저 실천해 왔다. 비록 약간의
표 차이로 낙선했지만 도의원 선거에 나가면서 노동자가 정치세력화에
앞장서야 함을 몸으로 보여 주었다. 
또한 현장 강화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믿음으로 스스로 노동조합
교육위원을 자임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박상철 후보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운동 속에서 항상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해고기간 동안 노동조합 대의원과
회계감사를 맡았고, 노동조합 발전을 위해 자임한 교육위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노동운동의 전망을 만들기 위해 몸으로 실천해 왔다.
어느 누구보다도 노동운동을 쉽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어려운
길을 택했고 그 선택을 한번도 후회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원칙이 바로
서지 않은 운동은 자신도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합원 대중들을
올바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이 평소 그가 생각하는 운동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도집행력이 사라진 금속연맹! 지도부만 있고 현장은 없는
금속연맹! 무너지고 파편화된 현장조직력을 하루빨리 복원시켜야 할
금속연맹!
위기의 금속연맹을 올바로 세우는 일은 현장 중심의 분명한 운동원칙과
올바른 전망을 가진 새로운 지도부가 해 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기호2번 수석부위원장 후보로 나선 박상철 동지는 18년
현장활동 경험과 조직활동 경험, 운동에 대한 분명한 원칙, 대안을
제시하는 정책능력으로 금속연맹을 바로 세우는 적임자임을 우리는
믿는다.

<현대자동차노조 조합원  권오룡>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