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동지들께 정형기 후보를 지지하며 현장에서 드리는 글
작성자 김일주
본문
기아자동차에서 노동운동을 말할 때
항상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이름이 있다.
토요일 저녁 야간 특근을 마치고 금속동지들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저는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 근무하는 김일주입니다.
정형기...그래...그라면 위기에 빠진 금속연맹을, 위기를 희망으로 헤쳐
나가기 위한 금속노동자의 운명을 믿고 맡기면 될 수 있다는 확신하며
이제야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
■ 형의 열정은 운동의 표본입니다.
그가 금속연맹 위원장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후 줄곧 그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였다.
내가 처음 본 정형기는 91년 6.28투쟁에서 잠시였으나 인상은 무척
강하게 각인되었다.
기아자동차의 6.28투쟁은 위원장의 직권조안으로 벌어진 조합원들의
파업투쟁이었는데 당시 그는 어용집행부의 임금합의를 반대하고 재협의를
주장하다 해고 생활 중이었고, 현장에서 비상대책위를 이끌면서 조합원과
함께 7일간의 파업투쟁을 완벽한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으로 사측은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았으며, 원직복직 합의도 휴지가
되어 수배생활을 하였다.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수배 중에 이미 그의
아내는 임신하였었다.
그와 직접적으로 인연이 된 때는 6.28 투쟁 이후 해고된 동지들을
규합하여 기해투, 전해투를 조직하고 전국투어로 많은 해고노동자를
복직시키면서 마지막으로 93년~94년 기아 현장으로 들어와 소하공장과
화성공장에서 복직투쟁과 단식투쟁을 할 때였다.
당시 6.28 해고자 일부와 정형기 그는 화성공장에서 원직복직을
전개하였고, 지금의 1만2천명의 조합원이 있는 화성공장에서 현장
노동운동의 질적인 변화를 제시하였다. 당시 화성공장은 89년에 건설되어
현장활동은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매일 아침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퇴근길에 나와 원직복직을
절규하듯 외쳤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뿐만 아니라 장기간의
힘든 단식투쟁 중에도 화성공장의 새내기 활동가들을 교양시키는 그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기아노동운동의 산증인이며, 역사를 일궈온 불굴의 투사!
그는 삶은 편안할 날이 없었으나 항시 현장에서 투쟁하는 그는 진정한
투사이다.
그가 후배들에게 뿐만 아니라 선배에게서 조차 존경받는 것은 그의
모습에서 운동에서의 권위주의나, 나태함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후배들 보다 정력적이었고, 후배들이 질릴 정도로 파격적인
투쟁들을 실천으로 옮겼다. 후배에게 투쟁을 요구하기에 앞서 실천으로
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면서 따라오도록 하였다. 집행 경험이 없는
그였으나 커다란 투쟁에서 항시 노동조합 집행부를 지도하였다.
기아 부도 이후 고용투쟁과 97년 노동법개악 저지투쟁, 그리고 화성공장
인근에 있는 매향리 사격장 철거 투쟁 및 매년 치러지는 임단협 투쟁 등
크고 작은 각종 투쟁들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 지도부를 지도할 뿐만 아니라 간부에서부터 현장을 직접
조직하는 투사였다.
이런 그를 지켜보면 도대체 어디서 저런 열정과 정력이 나오는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과연 어느 누가 이런 그를 집행 경험이 없다하겠는가?
■ 정형기 형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는 항상 강하지만은 않았다.
모든 면에서는 철저하고 강인한 투사였으나 후배나 동지에 대한 문제에서
만큼은 따뜻한 인간이었다. 힘든 수배투쟁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
구속되는 후배를 보며, 꾸짖기도 하였지만 안타까워했고, 한편으론
후배를 이해하려 애썼다.
또한 어른이 되면 눈물을 흘리는 이가 없으련만 그는 동지들에게는
기아의 투쟁의 기풍을 잃고 쉽게 타협하는 모습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노동조합을 보며, 옳지 않은 길로 가는 후배와 동지들을 보며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에서 강한 투사의
따뜻함을 보았다.
무엇보다 그가 위기에 빠진 금속연맹과 금속노동자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확신이 드는 것은 기아노동자들에게 강의하는 모습에서이다.
기업의 벽을 뛰어넘어, 대기업노동자의 기득권을 버리라고 꾸짖으며,
기아노동자의 사회적 책무 이행은 산별전환에서 부터임을 매번 교육에서
조합원들에게 강하게 주장하였다.
교육이라기 보단 선동에 가까웠으며, 비정규직의 문제를 푸는 구조적인
해결은 산별노조의 전환과 금속노조의 강화라고 가르치는 모습은 투사의
모습이었다.
그는 전국의 사업장, 현장조직을 넘나들며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 대한
투쟁방향을 제시하는 교육을 진행했었다.
항시 교육에서 희망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그가 진정한 희망이었다.
그는 기아에서 담기 벅찬 투사이다.
언제 잠을 자는지, 언제 집에서 쉬는지 정말이지 신비롭기까지 하다.
기아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 울산에서, 군산에서, 대전에서,
서울에서, 창원에서 전국을 마치 현장처럼 누비는 그는 신비롭다.
깡마른 얼굴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정력.
그는 금속연맹 아니 그 이상을 담아야할 투사이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그는 분명히 금속연맹에서 큰일을 칠 것이다.
기아에서 운동의 올바른 기풍을 만들 듯 금속연맹에서 사고(?) 칠 것을
기대한다.
노동계급과 민중, 그리고 조국을 위해....
2004년 12월 12일 아침.
기아차 화성공장 김일주 드림
항상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이름이 있다.
토요일 저녁 야간 특근을 마치고 금속동지들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저는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 근무하는 김일주입니다.
정형기...그래...그라면 위기에 빠진 금속연맹을, 위기를 희망으로 헤쳐
나가기 위한 금속노동자의 운명을 믿고 맡기면 될 수 있다는 확신하며
이제야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
■ 형의 열정은 운동의 표본입니다.
그가 금속연맹 위원장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후 줄곧 그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였다.
내가 처음 본 정형기는 91년 6.28투쟁에서 잠시였으나 인상은 무척
강하게 각인되었다.
기아자동차의 6.28투쟁은 위원장의 직권조안으로 벌어진 조합원들의
파업투쟁이었는데 당시 그는 어용집행부의 임금합의를 반대하고 재협의를
주장하다 해고 생활 중이었고, 현장에서 비상대책위를 이끌면서 조합원과
함께 7일간의 파업투쟁을 완벽한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으로 사측은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았으며, 원직복직 합의도 휴지가
되어 수배생활을 하였다.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수배 중에 이미 그의
아내는 임신하였었다.
그와 직접적으로 인연이 된 때는 6.28 투쟁 이후 해고된 동지들을
규합하여 기해투, 전해투를 조직하고 전국투어로 많은 해고노동자를
복직시키면서 마지막으로 93년~94년 기아 현장으로 들어와 소하공장과
화성공장에서 복직투쟁과 단식투쟁을 할 때였다.
당시 6.28 해고자 일부와 정형기 그는 화성공장에서 원직복직을
전개하였고, 지금의 1만2천명의 조합원이 있는 화성공장에서 현장
노동운동의 질적인 변화를 제시하였다. 당시 화성공장은 89년에 건설되어
현장활동은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매일 아침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퇴근길에 나와 원직복직을
절규하듯 외쳤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뿐만 아니라 장기간의
힘든 단식투쟁 중에도 화성공장의 새내기 활동가들을 교양시키는 그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기아노동운동의 산증인이며, 역사를 일궈온 불굴의 투사!
그는 삶은 편안할 날이 없었으나 항시 현장에서 투쟁하는 그는 진정한
투사이다.
그가 후배들에게 뿐만 아니라 선배에게서 조차 존경받는 것은 그의
모습에서 운동에서의 권위주의나, 나태함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후배들 보다 정력적이었고, 후배들이 질릴 정도로 파격적인
투쟁들을 실천으로 옮겼다. 후배에게 투쟁을 요구하기에 앞서 실천으로
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면서 따라오도록 하였다. 집행 경험이 없는
그였으나 커다란 투쟁에서 항시 노동조합 집행부를 지도하였다.
기아 부도 이후 고용투쟁과 97년 노동법개악 저지투쟁, 그리고 화성공장
인근에 있는 매향리 사격장 철거 투쟁 및 매년 치러지는 임단협 투쟁 등
크고 작은 각종 투쟁들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 지도부를 지도할 뿐만 아니라 간부에서부터 현장을 직접
조직하는 투사였다.
이런 그를 지켜보면 도대체 어디서 저런 열정과 정력이 나오는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과연 어느 누가 이런 그를 집행 경험이 없다하겠는가?
■ 정형기 형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는 항상 강하지만은 않았다.
모든 면에서는 철저하고 강인한 투사였으나 후배나 동지에 대한 문제에서
만큼은 따뜻한 인간이었다. 힘든 수배투쟁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
구속되는 후배를 보며, 꾸짖기도 하였지만 안타까워했고, 한편으론
후배를 이해하려 애썼다.
또한 어른이 되면 눈물을 흘리는 이가 없으련만 그는 동지들에게는
기아의 투쟁의 기풍을 잃고 쉽게 타협하는 모습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노동조합을 보며, 옳지 않은 길로 가는 후배와 동지들을 보며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에서 강한 투사의
따뜻함을 보았다.
무엇보다 그가 위기에 빠진 금속연맹과 금속노동자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확신이 드는 것은 기아노동자들에게 강의하는 모습에서이다.
기업의 벽을 뛰어넘어, 대기업노동자의 기득권을 버리라고 꾸짖으며,
기아노동자의 사회적 책무 이행은 산별전환에서 부터임을 매번 교육에서
조합원들에게 강하게 주장하였다.
교육이라기 보단 선동에 가까웠으며, 비정규직의 문제를 푸는 구조적인
해결은 산별노조의 전환과 금속노조의 강화라고 가르치는 모습은 투사의
모습이었다.
그는 전국의 사업장, 현장조직을 넘나들며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 대한
투쟁방향을 제시하는 교육을 진행했었다.
항시 교육에서 희망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그가 진정한 희망이었다.
그는 기아에서 담기 벅찬 투사이다.
언제 잠을 자는지, 언제 집에서 쉬는지 정말이지 신비롭기까지 하다.
기아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 울산에서, 군산에서, 대전에서,
서울에서, 창원에서 전국을 마치 현장처럼 누비는 그는 신비롭다.
깡마른 얼굴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정력.
그는 금속연맹 아니 그 이상을 담아야할 투사이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그는 분명히 금속연맹에서 큰일을 칠 것이다.
기아에서 운동의 올바른 기풍을 만들 듯 금속연맹에서 사고(?) 칠 것을
기대한다.
노동계급과 민중, 그리고 조국을 위해....
2004년 12월 12일 아침.
기아차 화성공장 김일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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