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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표성배 시집 『내일은 희망이 아니다』 (삶이보이는 창, 2018)
책소개
표성배의 시는 변함없이 노동 현장에서 발화한다. 그의 시는 그러나 한탄이나 분노보다도 담담하다. 내일의 희망도 믿지 않지만 오늘의 부조리를 용인하지도 않는다. 비록 지나가버렸지만 과거에 있었던 혁명적 사건을 떠올린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을 운명이라 보고 있는 것도 같은데, 수동적인 정서는 당연히 아니다. 표성배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 그 꿈의 내용과 색깔과 모양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시인이란 무릇 꿈꾸는 존재이기에, 아니 시라는 것은 꿈의 기록이기에 꿈은 시의 심장과도 같다. 꿈을 통해서만이 시에 피가 돌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꿈꾸기는 표성배 자신이 노동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듯싶다. 꿈을 버리는 세계에서 꿈을 꾸는 일, 시인에게는 괴로운 일이지만 시에 있어서는 살아 있음과 그렇지 않음을 가르는 구분선이다.
저자소개
표성배는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1995년 제6회 ‘마창노련문학상’을 받으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기찬 날』 『은근히 즐거운』 등이 있으며, 시산문집으로 『미안하다』가 있다. 공장이 꼭 삭막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함께 살아가야 할 따뜻한 공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삶의 현장을 서정적 온기로 감싸 안는 시를 쓰고자 노력하고 있다
목차
시인의 말ㆍ5
제1부
화음ㆍ12 오십 세ㆍ14 낙화 시대ㆍ16 자본주의1?기계와 속도ㆍ18 혼밥 시대ㆍ20 대한문 앞에서ㆍ22 저녁놀ㆍ24 내일은 안녕하십니까ㆍ26 좀 솔직하게 살자ㆍ28 탈선ㆍ30 마이산에서ㆍ32 내일은 희망이 아니다 ㆍ34 황사 바람 ㆍ36 언 강 위에 서서 ㆍ38 노을을 등지고 걷다 보면 ㆍ40
제2부
부부ㆍ42 장마전선ㆍ44 길 위에서ㆍ46 명확한 길ㆍ48 불가사리ㆍ50 낮달ㆍ51 몽고정ㆍ52 이 밤과 좀 친해져야겠다ㆍ54 선암사에서ㆍ56 무거운 시ㆍ58 하늘 호수ㆍ60 건망증ㆍ62 능인ㆍ64 파도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ㆍ66 이런 날ㆍ68
제3부
자본주의2ㆍ72 마산자유수출지역ㆍ74 통일이 안 되는 이유ㆍ76 봄을 부르는 소리ㆍ78 절명시ㆍ80 나는 마산에 살고 있다ㆍ82 파랑새ㆍ84 마산 10·18 그리고ㆍ86 129번ㆍ88 공존하는 시대ㆍ90 저녁이 있는 삶ㆍ92 광장 안에 사는 비둘기ㆍ94 비무장지대ㆍ96 불꽃ㆍ98 세월호ㆍ100
제4부
Korean dreamㆍ102 기계 소리ㆍ104 공장 빙하기ㆍ106 취업공고판 –박영근 시인ㆍ08 프레스 앞에서ㆍ110 삼대ㆍ111 문송면ㆍ112 1980년대 그때는ㆍ114 지독ㆍ116 혁명은 없다ㆍ118 슬픈 이름ㆍ120 가난한 사람들ㆍ122 일터에 봄은 오는가ㆍ124 겨울 산은 봄을 의심하지 않는다ㆍ126
산문_노동시와 노동 시인ㆍ127
책 속으로
기계를 만든 손
손이 움직이자 기계가 돌아간다
손과 기계는 한 몸
기계 돌아가는 부드러운 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하루,
쿵-쿵-쿵- 프레스 소리
쇠를 갈아내는 그라인더 소리
땅- 땅- 땅- 망치 소리
쇠를 녹여 붙이는 소리
소리가 어울려 내는 이 화음
공장에 첫발을 들이던 순간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거대한 공연장
_「화음」 전문
/
한 치 앞을 볼 수 없군요
갱도 끝은 어디쯤일까요
새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위안이 언제나 뒤에 있기 때문이랍니다
매일 밤 긴 관을 따라 흐르는
강물 소릴 들어요
지나온 길 소나무는 푸르고
노을은 여전했습니다
이 강을 가로지르는 기러기 한 마리가
안부를 묻는 저녁입니다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내일은 안녕하십니까」 전문
/
한 방울 물에서부터
한 사람의 생이 결정된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다
저 기세 좋은 파도 앞에 서서
꾹 참는 법을 이제야 배운다
두 눈 부라리고 죽을 듯 덤벼야
꼭 가슴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삼켜야 할 것들 참지 못해 뱉어내고는
후회하는 일 허다하다는 것을
오십에 알았다고 하면 누가 믿어주나
천방지축 뿔 난 아들과 단 둘이 바닷가에 서 있다
파도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온몸으로 파도처럼 말해보지만
소리가 되지 않는다
_「파도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
/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공장 정문에다 심어야겠네
공장이 화석이 되어 지구 곳곳에서 발견될 때
새파랗게 잎 틔우고 열매 맺어
여기가 공장이 있던 자리라고 유일하게 증명해줄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이 빙하기를 견디고 견뎌
지구의 역사가 되는
버림받은 노동자들 가슴을 심어야겠네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네
공장 정문에다 심어야겠네
_「공장 빙하기」 전문
출판사 서평
망치 소리가 봄을 부른다
시인 표성배는 공장 노동자이다. 시인에게는 삶의 진위와 경중과 높낮이를 자신의 노동으로 잰다. 심지어 봄을 부르는 것도 공장의 망치 소리이다. 시인이 얼마나 자신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봄을 부르는 소리」에서 망치 소리가 “두꺼운 강철을 뚫어 강철 길을// 쇠를 굽혀 부드러운 곡선 길을//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드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화음」이라는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손과 기계는 한 몸”이라고 하는데, 시인이 어떻게 노동자가 되어야 했는지 그 전사(前史)가 「불가사리」라는 작품에 드러나 있다.
새끼들이 더 높이 더 멀리 날기를 소원했다 천도를 하듯 아버지는 다섯 식구를 날갯죽지 속에 품고, 해 지지 않는 도시를 선택했지만, 도시는 아버지를 반기지 않았다 그게 가장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실수였다 도시는 처음부터 무릎을 꿇리고 튼튼하던 두 날갯죽지를 꺾음으로써 위엄을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위엄 앞에 아버지는 단 한 번 고갤 들지 못했다
(…)
어린 동생은 직업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공장으로 소처럼 팔려 갔다
_「불가사리」 부분
자본주의 임금 노동자의 탄생이 언제나 그렇듯이, 시적 화자도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흘러 들어와야 했다. 시인의 경우는 아버지 대부터 도시 노동자가 되어야 했지만 당연히(?) 그것은 대물림 되었다. “어린 동생은 직업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공장으로 소처럼 팔려 갔다”라고 담담히 쓰고 있으나, 사실 “어린 동생”의 경우와 시적 화자의 경우는 동일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에게 고향이란 어떤 곳인가? 그곳은 또 “해방되고 전쟁이 나고”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끌려가신 서른일곱 살의 할아버지”의 삶이 묻힌 곳이다. 거기에서 할머니는 “파랑새”를 기다렸지만, “파랑새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시인은 안다.(「파랑새」)
역사는 진화하지 않는다
표성배 시인이 자신의 노동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동시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장을 떠받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공장으로 떠민 역사적 배경을 그의 가족사가 증명하고 있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임금노동은 과거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미래를 끊임없이 위협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안녕하십니까」에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을 피력할 때, 또는 표제작인 「내일은 희망이 아니다」에서 “한 번 지나간 바람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침통한 고해는 저 뜨거웠던 시대가 반복되지 못하고 자본의 먹이사슬에 편입되어버린 현실을 아프게 직시하고 있다는 증좌이다.
역사가 진화한다는 말
잔인한 말,
언 강 위에 서보면 안다
강과 내가 한 몸처럼 느껴지지만
한 몸이 아니다
_「언 강 위에 서서」 부분
역사가 진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은 표성배 시인에게는 경험적인 사실이다. “광란의 시대를 가로지른// 내 누님들 가난한 숨소리가// 아직도 합포만 파도 소리를 잠재우고 있”(「마산수출자유지역」)기 때문이다. 또 “파도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온몸으로 파도처럼 말해보지만// 소리가 되지 않는다”.(「파도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표성배의 현재 인식은 이렇게 우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바다” 같은 역사의 지평에 섰을 때에 그렇다. 그와는 반대로 이번 시집에서 표성배는 자신과 가까운 존재들에게서 사랑을 배운다.
저 돌에서 배운다
이제 “청춘은 갔다”면서도 역설적으로 “건망증을 사랑하는 것”이나 “사랑의 거리가 딱 그만큼”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까운 데에 대한 재발견과 상관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까운 데’는 지난 역사의 사건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컨대 “떨어져 시든 꽃잎이 상흔처럼 남아 있는 1946년 10월 1일 대구 그리고……, 그 하늘 아래 불꽃을 나는,// 10월항쟁이라 부르고 쓴다”(「불꽃」)고 할 때나 “한때 부끄럽지 않았던 기억을 더듬는다// 3·15와 4·19, 10·18의 함성을// 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의 자랑스러웠던 노동자를// 나는 아직 마산에 살고 있다”(「나는 마산에 살고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섣부른 전망보다 지난 시간을 더욱더 단단하게 여미겠다는 자신만의 전략일 수 있다.
첫발을 내딛고부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함부로 돌을 원망하지 말라 돌은 절명해도 단단한 정신은 살아 있다
어둠이 강산을 뒤덮어도 빛나는 아침을 그리며 한 시절 우린 절명시를 외우며 건너왔다
하루를 버티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 저 돌에서 배운다
_「절명시」 부분
표성배는 이렇게 우리를 넘어뜨린 “돌”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랑이 가끔은 소소하게 가족에게 뻗치는 경우도 있지만, 진실은 그러한 소시민적 사랑이 아니다. 시인 자신의 삶과 시를 가능케 했던 ‘거대한 뿌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이제 시인은 지나가버린 혁명적 열정이 자신을 떠나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대신 그 혁명적 열정 이전의 시간을 불러들인다.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상관없다. 언젠가는 없어질지도 모를 “공장”을 증명해주기 위해 “은행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공장 빙하기」)다는 생각이 사랑이 아니라면 가능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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