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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노동운동(제1장 임금문제는 왜 발생하였는가?)
작성자 조사통계
댓글 0건 조회 129회 작성일 2016-06-02

본문

1장 임금문제는 왜 발생하였는가

 

1. 임금문제의 출발점

 

18321월 프랑스 법정.

수석판사: “당신의 직업은?”

블랑끼: “프롤레타리아

수석판사: “그것은 직업이 아니지 않은가?”

블랑끼: “무엇이라고! 직업이 아니라고? 그것은 노동으로 살아가며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3천만 프랑스인의 직업이다!”

 

프롤레타리아 - 이 새로운 직업으로부터 임금문제는 발생한다. 블랑끼는 이 3천만명의 프롤레타리아가 거리로 뛰쳐나와 자신들의 처지에 울분의 목소리를 터뜨리며 쌓아놓은 바리케이트의 선두에 섰다가 이 재판정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블랑끼는 이 3천만명의 대중과 끝까지 결합하지는 못하였다. 이들은 조직되지 못하였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바리케이트 앞으로 뛰쳐나간 블랑끼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미 블랑끼가 보고 있던 이 3천만명의 프롤레타리아는 이제 프랑스의 현실이었다. 그것도 다수대중의 무시할 수 없는 는 사회적 현실이었다. 이들의 현실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이들을 거리로 뛰쳐 나오게 했을까? 일차적으로는 가난때문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열악한 주거상태, 형편없는 의복, 매우 빈약한 식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숫자는 대단히 많아서 사회전체에 영향을 미칠만 했던 것이다.

 

그들이 매일 아침 도시로 흘러 들어와서 저녁에 다시 도시를 빠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부인들로서 그들은 창백하고 굶주리고 진흙속에서도 맨발 상태였으며 부인들보다 좀더 많은 수의 어린애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더럽고 야위었으며, 직기옆에서 일을 하면서 뒤집어 쓴 기름이 잔뜩 쌓여 두터워져 버린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영국에도 독일에도 유럽 전체에 걸쳐서 어느 곳에나 있었다. 이들은 일반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1817년 왕립의과대학 교수 앨리슨 박사(Dr. W. P. Alison)의 보고: “(더블린의) 니콜슨(Nicholson)골목에는 28개의 낡고 조그만 방에서 151명이 절대적 궁핍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골목을 통털어 2개의 침대와 2장의 담요밖에 없다

맨체스터에 대한 보고: “옥스포드 로드(Oxford Road) 남서쪽 리틀아일랜드(Little Ireland)로 알려진 (이 곳에는) 200채의 집들로 이루어진 두 개의 (노동자 주거주역이 있으며) 여기에서 약 4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거리는 울퉁불퉁하며 배수시설이 되어 있지 않다. 많은 음식찌꺼기와 쓰레기 그리고 병을 일으키는 오물 등이 웅덩이 옆에 사방으로 퍼져 있다. 이런 것이 내뿜는 악취, 그리고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공장굴뚝에서 내뿜는 매연으로 주변환경은 오염되고 새까맣게 그을려 있다. 헐벗은 여인네와 어린이들이 쓰레기더미와 웅덩이 안에서 돼지만큼이나 더러운 차림으로 이 주변을 돌아다닌다. (위생감독관들은) 380명이 사는 팔라멘트가(Parliament Street), 그리고 30채가 넘는 팔라멘트가의 골목에 옥외변소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노동자들이 입고 있던 옷에 대한 토마스 카알라일의 묘사: “입고 벗기가 매우 어렵고 결혼이나 축제때에만 겨우 갈아입는 누더기 옷

 

이처럼 극도의 빈곤에 허덕이는 프롤레타리아의 숫자는 1830년대 영국의 대도시들에서 도시 전체 인구의 60-8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의 부분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반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의 문제는 이런 가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난은 오랜 옛날부터 늘상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에게만 해당하는 유별난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좀더 깊은 곳에 있었다. 프롤레타리아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 노동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정상적인 건강을 해치는 수준으로 너무 많이 노동하는 사람들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하여 가능한 한 온가족이 모두 노동하였으며 이들의 노동시간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만큼 길었다.

 

182054일자 󰡔농공업자시보󰡕(Manufacturers' and Farmers' Record)의 한 광고: “면직물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아동이 5명에서 8명 정도 있는 가족을 구함

1844년 공장감독관 손더스(Saunders)의 보고서: “여성노동자 중에는 며칠을 제외한 수 주일동안 계속해서 2시간이 채 못되는 식사시간을 포함하여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기때문에 주중 5일동안은 통근시간과 침대에서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이 통털어 6시간밖에 되지 않는 부인들이 있다

공장주들은 보통 8-9세의 어린이들을 고용하고 있다. 그러나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5살짜리 어린이도 고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6-7세 어린이를 고용하는 것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노동시간은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14-16시간에 이른다.

어느 양말직조공의 술회: “지난 월요일 나는 새벽 2시에 일어나 거의 한밤중까지 일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다시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저녁 11-12시까지 일했다. 나는 그럭저럭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계속 그렇게 한다면 결국 죽게 될 것이다.

 

아주 어린 아이와 부녀자도 노동에 참가하였으며 그것도 14시간 이상을 노동하였다. 성인남자의 경우는 이 보다도 더 오랜 시간 그야말로 죽도록노동해야만 하였다. 그런데도 극도의 빈곤이 이들 곁에 늘상 붙어 다녔다. 가난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빈곤은 특정한 노동자집단만이 겪는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 가족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통례적인 특징이었다. ‘가난은 거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닥쳐오고 말았다.’

 

프롤레타리아는 일할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기회가 닿는대로 노동 또는 노동의 규칙적인 수행을 필요로 하고 있는 자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당장 굶어 죽을 염려는 없지만 형편이 좋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빈곤에 빠질 위험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벌자마자 먹기 바쁘며 그날 번 것은 그날 써 버린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은 기근에 대한 생사를 건 투쟁이다.

 

그래서 가난을 둘러싸고 진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가난이 게으름의 소산이 아니라면 이 가난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해결할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블랑끼를 법정에 세웠던 프롤레타리아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 물음은 이렇게 집약된다. 왜 이 가난을 피할 수 없을까? 그것은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프롤레타리아들의 생활조건은 과거에 비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산업화 이전에는 노동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농노이든, 가내수공업노동자이든 혹은 매뉴팩처노동자이든 모두 자신이 주거할 조그만 집, 한뙈기의 토지, 채소밭, 염소 한마리, 또는 운이 좋을 경우 암소 한 마리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최소한의 소유물들은 비상시의 궁핍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해주는 훌륭한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농촌에 있었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농촌의 일자리는 모두 사라졌으며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자리는 대도시의 공장지대로 집중되었다. 대도시에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단 한뼘의 땅도, 그리고 채소밭도, 한 마리의 염소도 없었다. 이제 가난에는 아무런 방패막이도 없어졌던 것이다. 바로 그래서 가난은 이제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으로 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들이 생계수단으로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을 통한 유일한 성과, “임금뿐이었다. 그러나 그 임금은 그들의 가난을 전혀 막아주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제 임금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곧 가난의 방패막이를 잃은채 가난을 숙명처럼 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노동은 가난과 세트가 되었다. 가난과 세트가 된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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